엊그제 비 덕분에 연두가 연두해지고 초록이 초록하고 있다.
말랐던 봉우리가 빗물을 먹고 어느새 통통해졌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공식적으로 주어진 휴식시간이다.
오늘도 의식하 듯, 안 하듯 전자시계가 12시에 맞춰지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가끔 고된 육체적, 정신적 노동으로 오전 업무를 치르면 타이밍을 못 맞춰서 11시 30분부터 시계를 노려보는 일이 발생하지만 대부분은 신체타이머가 맞춰져 있기 때문에 정오를 맞춘다.
나는 공식적인 휴식을 누리기 위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4층 식당으로 올라간다.
점심 메뉴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15분 만에 식사를 마친다.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식사하는 것이 사람사이의 밥상 정이겠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식탐이 없진 않지만 식사는 배를 채우기 위한, 공급의 과정으로 치부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식사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매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15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부리나케 가는 곳은 일터 근처에 있는 공원이다.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을 100미터쯤 걸어가면 어린이 놀이터가 같이 있는 단대공원이 나온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등교한 시간이라 주인 없이 고요하다.
가끔 해바라기 하러 나오신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빨강, 보라옷을 철쭉처럼 입고 앉아 계셔서 꾸벅 인사를 드리고 지나가지만 대체로 정오에는 들리는 이가 없다.
주인 잃은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계단을 올라 공원에 들어서면 오히려 소란스러워진다.
어린 연두색 잎과 다 자란 녹색잎이 그러데이션으로 어우러지고 옛 민요의 가사 그대로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울어댄다.
도심 속에 이런 각양각색의 새가 서식한다고는 단대공원에 오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이러 호사를 일터에서 가깝게 누릴 수 있다니... 뜬금없이 근무 환경 만족도까지 높아질 판이다.
얼마 전까지 눈까지 오락가락하면서 봄이 오는 걸 느낄 새가 없었는데 봄이 발 앞을 온 걸 느끼기도 전에 저 뒤꿈치로 지나가고 있다.
이런 찰나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요즘 부쩍 더 식사 시간을 단축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대롱대롱 매달린 장구벌레가 새롭게 등장했다.
장구벌레 줄이 어디서 오는지, 어디부터 시작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길가에 3마리가 매달려 있다.
'어머, 어머'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보다가 결국 팔에 장구벌레 줄이 걸렸다.
"으악~~~"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장구벌레가 몸에 올라탈까 싶어 고함을 지른다.
훗! 도시여자 다 되었구나 싶다.
짧고 강렬한 장구벌레와의 스킨십의 여운을 진저리 치며 털어버린다.
그런데 장구벌레가 커서 나비가 되는 거였나? 그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그 나비?
이런... 역시 도시여자였다.
장구벌레는 커서 모기가 된단다.
첫 만남부터 한 번에 3마리를 만났으니 올여름 모기 농사는 풍년이겠다.
일명 죽음의 계단이라 불리는 공원의 클라이맥스로 간다.
혹자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주야장천 만두만 먹는 것처럼 단대공원 내 여러 길 중 주궁장창 이 길을 고집한다고 했지만, 왠지 이 길을 벗어나면 휴식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않은 것 같은 찝찝함을 느끼는데 아무래도 클라이맥스를 스킵한 심심함 때문일 것이다.
클라이맥스를 가기 위해서는 흔한 철쭉나무를 지난다.
흔하디 흔한 철쭉이지만 이 길을 매일 가다 보면 얼마 전까지 마른 잎과 마른 봉우리었는데 어느새 통통해진 꽃을 만난다. 흔하지만 반갑다. 봄이 오길 기다리듯이 꽃잎이 통통해지길 내심 기다렸었나 보다.
철쭉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클라이맥스 죽음의 계단 이전에 녹음이 우거진 광장이 나온다.
이쯤에서 "이야~~ 날씨 진짜 좋다. 잎이 정말 예쁘다"등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제보다 연한 연두잎이 더 나오고 녹색이 더 짙어지는 풍경이 또 새롭다.
고요한 숲의 소리와 연두색과 녹색을 보고 있노라면, 오전의 고된 노동은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린다.
오전 3시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침 출근 시간의 급박함부터 지난밤에 미처 전달되지 못한 업무들이 밀어닥치니 나도 모르게 긴장되는 노동이었을 것이다.
일터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아마도 힘을 주고 있었나 보다.
김하나 작가는 '힘 빼기의 기술'에서 힘들 때 힘을 빼면 힘이 생긴다고 했었는데 나는 아마 오전 업무의 힘을 빼기 위해서 도망치듯 단대공원을 찾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한다.
드디어 마지막 클라이맥스 일명 '죽음의 계단'에 다다른다.
'죽음의 계단'이라 하면 옛 영화 '여고괴담'의 배경인 여고에 있는 밤에 계단수를 세다 몇 번째 계단을 발견하면 죽는다는 계단이나, 계단수가 너무 많아서 오르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는 계단을 상상할 수 있지만,
단대공원의 죽음의 계단은 심박수 150에 도달할 수 있는 정도의, 적당히 숨 가쁨을 선물하는 계단이다.
계단을 오를 때 어떤 이는 너무 힘들어 땅만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동행인의 옷자락을 생명줄 삼아 오르지만 나는 매일 오르는 계단이지만 바닥과 풍경을 두리번 거린다.
계단 옆에 새롭게 핀 버섯은 없는지, 새롭게 출몰한 외래종 벌레는 없는지 찾으며 이 시간을 만끽한다.
도시여자로서 너무 크고 갑자기 나타난 녀석들에게 고함 한번 질러 놀라움을 선사하지만 그래도 반갑다.
이토록 풍요롭고 다채로운 자연이 나에게 오후 업무를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