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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 약국 Jan 24. 2021

"이번에는 진짜, 새해에는 꼭 끊을 겁니다."

약국 일기

"이번에는 진짜, 새해에는 꼭 끊을 겁니다."

알코올 의존성 치료제를 처방받은 이 중년의 남자에게 전에도 두어 번 투약을 한 적이 있다. 올 때마다 발그레 취한 얼굴로 멋쩍게 웃으며 약을 타 가곤 했다. 그 날은 해가 바뀌기 3일 전쯤이었고 새해에는 끊어야 하기 때문에, 끊을 것이므로, 아쉬움 때문에 평소보다 더 마셨는지 술냄새가 꽤 많이 났다.

"하루아침에 확 끊으려고 하면 아쉬움이 커서 힘들어요. 약 드시면 술 생각이 덜 나고 마음도 편해지니까 조금씩 줄여보세요." 그의 약은 아캄프로세이트, 정신과에서 가끔 처방이 나오는데 알코올에 대한 갈망(craving)을 줄여준다고 한다. 그의 결심이 너무 호기로워 어쩐지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우리는 종종 '새해'라는 단어에 큰 기대를 건다. 새해에는 꼭 끊어야지, 새해부터 시작할 거야, 해가 바뀔 때면 몸에 밴 지긋지긋한 습관을 떠나보내고 새롭게 달라진 모습을 다짐한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happy new year를 외치는 순간 스톱워치가 0.00으로 리셋되듯이 이전의 실수나 과오는 반영되지 않은 새로운 기록을 상상하며 들뜨곤 한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스톱워치를 리셋할 때의 희망은 3일 이상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을 숱한 경험과 경험담으로 알고 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새 출발이 쉽지 않은 것은 몸의 변화를 너무 쉽게 여기기 때문이다. 술을 끊겠다고 선언해도 이미 알코올에 익숙해진 몸은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강한 자극에 길들여진 신경회로는 계속 자극을 갈망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과도한 자극이 주어지면 조절 능력은 망가진다. 이 상태에서 호기로운 다짐은 무기력하다. 의지력을 시험하거나 탓하기보다 몸을 살피고 습관과 환경을 바꾸어 보는 것이 낫다. 술을 끊겠다는 목표에 연연하지 말고 다른 습관이나 운동에 공을 들이는 것도 좋다. 몸의 변화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마음이 앞서 가지 않도록, 채근하고 몰아세우기보다 조금씩 꾸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하면 좋겠다. 


아캄프로세이트(acamprosate)나 날트렉손(naltrexone)은 알코올에 대한 집착을 줄여주고 재발 가능성과 재발 기간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약물이다. 내약성도 좋은데 약물만으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상담과 병행해야 한다.  


서른 중반부터 나는 한동안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깝거나 먼 미래에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일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그려지지 않았다. '날마다 새롭게', 나의 모토는 루틴 한 일상 속에서 즐겁고 재미난 일을 발견하며 살자는 것이었고 아이들은 내게 나날이 새로운 무언가를 선물해주곤 했다. 계획 없는 삶의 장점은 실망할 일이 없는 것이다. 계획대로 실행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여간해서 무언가를 결심하지 않는 부류이고 새해에는, 내일부터는~으로 시작하는 다짐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가 되면 어떤 의식처럼 새로운 다이어리를 마련하고 무언가를 끄적이게 된다. 읽고 싶은 책, 해야 하는 공부, 여행 계획 등을 적다 보면 기분이 좋다.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새해엔 약국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소심해서 날마다 혹은 일주일에 몇 번이라고 정하지 못했으나 노트북 책상을 방으로 옮기고 스탠드를 준비하고 앉아있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방석을 놓아두었다.

아캄프로세이트를 타 가던 중년의 남자, 기대 수준을 낮추고 조금씩 끊어 보라는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내게 군밤을 사주었는데, 그는 금주에 성공했을까? 기록에 대한 나의 열망과 다짐을 나는 얼마나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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