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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Mar 05. 2023

화학과 학생, 미술관 큐레이터로.(1)

과학 외길 인생에서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기까지의 여정, 준학예사 합격기

지금은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배우고 있다. 그 옛날 처음으로 미술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때 세웠던 긴 여정, 그곳에 적혀있던 목표를 따라 배움을 쌓기 위해 학교로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말은 조금 어색할지도 모른다. 여태 내가 다니던 학교와는 여러모로 닮은 점이 없는 곳이니 말이다. 이곳에는 비커를 닦기 위해 비치해 둔 아세톤의 냄새도, 노벨상 수상자 발표 기간만 되면 즐거운 목소리로 수상자의 연구를 설명해 주던 교수님도, 복도마다 세워져 있던 눈에 뿌려진 약품을 세척하는 기계도 없다. 대신 복도마다 놓인 거대한 캔버스와 전시 포스터, 옅은 물감냄새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제야 실감이 난다. 내가 가기로 한 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나는 이과대학 학부 4학년이 되던 2019년 봄 무렵 미술관 학예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결심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일부러 피한 것은, 실제로 그때의 마음은 거창한 이름표를 붙일 만한 것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여전히 즐겁지만 연구소에 박혀 지내는 삶은 내키지 않았다. 자유롭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세상의 진리를 찾아 나서는 길이 늘 내가 바라던 여정이었다. 과학으로도 그 뜻을 이룰 수 있겠으나 그 여정이 결코 빛나는 경이로움으로 채워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침 졸업까지 딱 1학점이 부족해서 듣게 된 문과대학 진로수업에서 박물관 학예사로 일하는 졸업생의 수기를 읽게 되었다. '학예사라는 직업이 있네? 미술관에도 있구나. 이거 한 번 해볼까?'. 그래서 마음을 한 숟갈 먹는 정도의 무게로 여정을 시작했다.


서른 살까지 해보고 안 되겠으면 깔끔하게 마음을 접자.
 대신 서른이 되었을 때 무언가 보인다면, 앞으로 나아가자.

가장 처음 세운 기준은 초조함을 해결하기 위한 다짐이었다. 기한을 정해두면 마감날 전까지는 망설이지 않고 달릴 수 있다. 매일의 나를 보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만큼 강한 적은 없으니 내가 나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 너무 자주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어리석은 시간들을 줄이기 위해 시간의 마지노선을 먼저 정했다. 그 뒤로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정들이 뒤따랐다. 학예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 배워야 하는 것들, 목적지를 향해 놓인 몇 가지 길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필요했다. 


비전공자가 미술관 학예사가 되기 위한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미술사, 미술이론 등 미술관 관련 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최소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다.

2. 준학예사 자격시험 필기에 합격한 뒤 필기합격자를 위한 실무이수 지원사업을 통해 미술관에서 경력을 쌓는다.


네이버의 '큐레이터 세상'이라는 카페에 가면 수많은 학예사 지망생들을 볼 수 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한 트럭은 돼 보였다. 모두들 저 두 길 사이에서의 결정을 가장 어려워했다. 1번의 경우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2번을 선택하더라도 어차피 비전공자는 석사학위로라도 미술과 관련된 학위를 따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이 이력으로의 학위가 되었든, 배움으로의 학위가 되었든 필요한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렇기에 1번이 빠른 길이다. 하지만 1번이 간과하는 점이 딱 하나 있는데 대학원에 합격하는 일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특히나 나처럼 화학과를 나온 경우가 더 그렇다. 학문 간의 교점이 하나도 없으니 지원서를 쓰는 본인이 오히려 민망해질 따름이다. 그렇기에 나는 2번 길을 택했다.


필기에 합격한 뒤 실무경력 1년을 채우면 준학예사 자격을 받을 수 있으며 준학예사 자격 취득 이후 4년의 경력을 더 쌓으면 3급 정학예사가 될 수 있다. 또는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2년의 실무경력을 가진 사람도 3급 정학예사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3급 정학예사부터 학예사로 대해준다. 내가 선택한 길은 이랬다.


준학예사 필기시험 응시 및 합격(1년)-> 준학예사 실무경력(2년)-> 실무경력 및 준학예사 자격을 바탕으로 석사 진학 및 졸업(2~3년)-> 준학예사 자격포기 이후 위의 실무경력으로 3급 정학예사 자격 신청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어찌 되었든 실무경력과 학예사 자격이 필요했던 만큼, 이 길이 가장 가능성이 높고 시간도 아낄 수 있는 길이었다. 준학예사 자격과 실무경력 2년이면 대학원에 진학할 때 이 분야에 대한 내 진심을 어필할만한 요소가 되어줄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무턱대고 대학원에 진학하기에는 이 분야에 대한 내 확신이 적기도 했으며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실무를 경험해 보면 나아가야 할 길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섞여있던 선택이었다. 


준학예사 자격제도는 필기와 경력 두 요건을 모두 충족했을 때 자격을 취득하도록 만들어졌다. 필기는 필수과목으로 박물관학(객관식), 선택과목으로 두 과목(서술형), 어학시험(공인성적으로 면제 가능)을 평가하여 과락 40점, 평균 60점을 넘기면 합격하는 방식이다. 박물관, 미술관 준학예사 시험인 만큼 선택과목의 폭이 정말 넓기에 학부전공에 가까운 과목을 선택하는 것도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미술관에서 일할 것을 목표로 한다면 미술사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진로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에 붙을 만큼 열심히 공부해 두면 비전공자로서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될 불안함을 조금은 잠재울 수 있다. 나는 미술사학과 전시기획론을 선택과목으로 골랐다.


아주 솔직한 말로, 지금 와서 고백을 하자면 나는 딱 한 달 공부했다. 그전까지는 학예사가 되고 싶다고 떠들기만 할 뿐인 예비 백수였다. 공부할 범위는 너무나 막연하게 넓고, 늘 해오던 학문과 전혀 다른 배경지식을 가진 과목들은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갈피조차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공부한다고 떠들어댈 뿐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역시 학원만 한 게 없다. 우리나라에는 도대체 학원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가 있을까 싶을 만큼 온갖 학원이 있나 보다. 준학예사 대비 학원을 위에서 언급한 '큐레이터 세상' 카페의 주인인 홍보라매 선생이 운영하고 있다. 홍선생은 수험생의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아는지 1년 준비반부터 한 달 준비반까지 다양한 커리큘럼을 준비해 두었다. 나는 한 달 만에 정리하는 미술사, 전시기획론 수업을 들었다. 커리큘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카페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 달간의 학원 수업 덕분에 시험에 붙을 수 있었다. 홍선생의 족집게 강의와 함께 초등학교 전과처럼 정리된 자료집 덕분에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으며, 결정적으로는 운이 좋았다. 공부가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운 좋게 아는 것들만 시험에 나와준 덕분에 꽤나 괜찮은 점수로 합격할 수 있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시험에 붙은 것만으로도 가능성이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아서 기뻤다. 이제 실무 경력을 채울 순서다.

 -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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