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지나가야 진짜 겨울이 오듯, 입시철이 지나가야 가을이 온다. '초등학생'과 '입시'는 영 안 어울리는 조합 같다. 아직 사춘기도 지나가지 않은 아이들은 벌써부터 경쟁 사회로 나간다. 우리 학원은 지난여름, 사립중학교에 입학을 위한 면접자소서반을 꾸렸다. 곧 10월 중순에 1차 시험이 있다.
아이들은 스스로(부모님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고통을 선택했다. 굳이 사립중학교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거주지에 맞는 중학교를 나라에서 배정해 주니까. 그런데도 아이들은 평일 저녁과 주말을 반납하며 글을 쓰고, 선행 학습을 해야 하는 입시 선택지를 골랐다. 면접자소서반이 꾸려질 땐 "굳이?"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외고나 자사고를 준비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초등학생 때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최근 들어 마음이 바뀐 이유는 권태보다 고통에 익숙해지는 편이 삶을 살아가는데 수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지역의 초등학교를 나온 입장에서, 나 역시 지금의 아이들처럼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하고, 그런 일상을 견디는 걸 당연시 여겼더라면 삼십 대를 훨씬 더 어른스럽게 보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인간 너머의 것을 찾아보다가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며, 인생은 권태와 고통 둘 중 하나라고.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통스럽고, 충족한 뒤로는 권태가 찾아온다고 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쇼펜하우어를 참 좋아하는데, 예전부터 장난스럽게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제야 그의 말이 와닿는다.
고통스럽다는 건 욕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입시를 준비하는 초등학생들에겐 좋은 중학교에 가고 싶다는 뜻이고, 나에겐 작가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고통은 평생의 동반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중간에 적절한 쉼, 적절한 대가들이 진통제 역할을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