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어쩌다 동거
2023년 치앙마이였다. 더 이상 추운 겨울을 참을 수 없을 때 찾아갔던 곳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겨울을 피난 온 전 세계의 사람들이 복작복작 몰려 있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렇게 시내 중심에서 벗어나고 싶어 다른 도시로 도망을 가 버리려다가 만난 여자였다. 인스타그램으로 알던 사람이 자신의 친구라고, 나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여자인 내게 여자를 소개해준 일이었다. 별 말도 없고 이 사람이 기쁜 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잘 알아채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나는 할 말이 언제든 많았기 때문에 상대는 말을 안 해도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좋은걸 지도 모르겠어. "바에 가보실래요? 저희 집 근처에 있는 곳인데." 만난 날 간단히 저녁을 고요한 여자의 오토바이 뒤에 얹혀 간판도 없는 폐허 같은 건물 안의 바로 끌려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도 아무도 날 찾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건물의 문을 열자 너무나도 고급스럽고 고요한 재즈바가 나타났는데 장소를 선택하는 걸 보니 나는 어쩌면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재즈바에 간 김에 근처에 있다는 집 구경을 가봤다. 내가 원하는 공간이었다 고급 리조트단지들 사이에 숨어있는 단독주택이었는데 2층집이었고 마당과 별도의 손님맞이 독채가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좋은 품질의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진 집은 관리가 잘 되어있었고 집주인들과 가족들이 머물던 집이라 배치된 가구들과 취향이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이 집의 가격도 묻지 않고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집을 싸서 이사를 와버렸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호텔은 취소 환불이 안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더 이상 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와 여자는 종종 주말마켓에 가서 누워있었고 각자 운동을 끝내고 집에 모여서 힘들어하다가 고기를 먹으러 다녔으며 승마를 배우고, 요가를 갔고 새벽까지 한 침대에 누워서 눈이 감겨도 비벼가며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언니 큰일 났어. 언니랑 같이 있으면 남자 생각이 하나도 안나. 언니는 왜 이렇게 웃기게 태어났어?"
"나는 네가 더 웃겨"
나와 여자 우리 두 사람 모두 여러모로 일반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평소에 특히 한국에서 별별 소리를 다 들으며 자라났는데 그런 사람 둘이 만나니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렸다. 서로 이상한 소리를 해도 그냥 웃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감정과 감성이 발달한 사람이었고 여자는 감정과 감성이 0에 가까운 로봇 같은 사람이다 여자의 직업은 IT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아기 사장이고 나의 직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행유튜버니까 우리 둘은 완전히 다른 주제의 인간형 태인 거었다. 그렇지만 가까워질 수 있던 이유는 우리 둘 모두 너무나 솔직했고, 그 솔직함에 상처받지 않았으며 즐거운 것이었다. 게다가 추가로 요가에 아주 빠져 지낸다는 점, 여행하며 살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한다는 것, 인류애가 없어서 사람들과 거리 두고 싶어 하고 도시를 기피하는 지점등이 비슷했다.
치앙마이에서 약 두 달을 한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여자는 방콕으로, 나는 한국으로 또 시드니로 우리는 각자 여행하며 지냈고 종종 영상통화를 하면서 뭐 하고 있는지 지켜봤다. 마침 6월이 되자 여자와 나 모두 한국에 당분간 머무를 계획이 생겼다.
"우리 집으로 가자"
"좋은 생각이야"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빈 집을 다 뜯어고쳐 25평 방 3개짜리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내 집에 딱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며칠간 머무를지 물어보지 않았고 여자 역시 묻지 않았는데 만나는 날 24인치 캐리어하나와 배낭을 메고는 서울역에 서 있었다.
"방콕에서 온 건가? 그게 너의 짐 전부야?"
"응"
"그럼 계속 안 가도 되겠다"
처음 며칠간은 치앙마이 집에 살던 또 다른 여자친구까지 나와 두 여자가 함께 지냈다. 여자 셋이 요리를 해 먹고 매 끼니마다 예쁜 식탁을 만들어 냈으며,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산책을 다녀왔다가 우리의 커리어에 대한 일 이야기를 했다. 그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의 야망에 대해 토론하고 영감을 주었으며, 피드백을 주었다. 어린 여자들 셋이서 시골마을을 돌아다니게 되자 옆집 할머니가 상추밭을 내주셨고 직접 캐신 양파와 마늘을 쥐어주시는 걸 보니 우리는 귀여움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며칠 지나고 먼저 잡혀있던 일정이 있던 여자 2는 잠시 해외로 떠났다. 귀국하자마자 다시 돌아오기로 했고 그 참에 해외에서 필요한 물건을 부탁했다. 나와 여자 둘이 시골에 남게 되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다가, 또 컴퓨터를 두드리다가 여자가 사라져서 방으로 몰래 들어가 보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할 일이 아주 많은데 나의 이 공간과 어울리는 사람 둘이 만나니 평화롭고 나른해서 자꾸만 잠을 자고 싶어 지는 것이다. 며칠 동안 늘어져있다가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시간표를 만들고 효율적으로 갇혀서 살아보기로 하고 계획을 했다. 또 다른 동성친구와 함께 살기를 몇 년 동안 하면서 인생이 바뀐 친구가 생각나서 전화했다. 그 친구에게 서로 함께 살면서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여러 가지 생활 루틴을 공유해 주면서 말했다 "개인은 팀을 절대 이길 수 없어" 여러 가지 팁을 듣고 여자와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서 계획했다. 너무 자유로워서 계획을 다 파괴하며 살던 우리가 안 지킬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실 벽에 아무렇게나 포스트잇으로 시간대마다 할 일을 적었다. 그것이 어젯밤의 일이었고 글을 쓰는 지금이 여자와 내가 잘 살아보기로 한 한 달 중 하루의 시작인 것이다. 나의 글은 지난밤의 이야기를 다음날 오전에 쓰는 방식으로 진행 중인 동시에 남기는 기록이다. 우리는 이번에 나의 한국 시골집에서 약 한 달 정도를 같이 살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사실은 이 역시 마지막날이 언제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아마 무슨 일이 생긴다면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중간에 싸우고 나갈 수도 있으며 지겨워져서 도망갈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해외 출장이 잡혀 나가게 될 수도 있는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쌓아둔 계획은 대략적으로 이렇다.
현재는 유예기간이다. 우리는 며칠간 계속 새벽 4시, 5시에 잠들어 11시에 일어나는 마음대로 루틴으로 살았던걸 생각해서 정해놨는데 앞으로 적응되면 조금 더 빨리 일어나 볼 작정이다. 이 스케줄을 정하고 각자 원하는 책 한 권씩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같은 책을 바꿔 읽고 토론하기 같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몇 가지 넣어뒀다. 정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을지부터 두 사람 모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시간표 만들고 12시간 경과.
아직까지는 잘하고 있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