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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Aug 31. 2022

복수의 대상이 가족인 사람

아버지는 집에서 가장 큰 형인 맏이였지만 결혼을 늦게 한 탓에

친척 형, 누나들 사이에서는 우리 형제는 가장 어린 막내였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추석과 설날에 우리 집은 친가 친척들로 집 안이 꽉 찼다.

친척은 우리 가족 외에 두 가족 정도가 더 참석해서,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4명 살기도 좁은 우리집에 친척들까지 오니 집 안이 꽉차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집은 친척들 중에 가장 좁은 집에서 살고 경제적 형편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맏이기에 추석, 설날이면 어머니 혼자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많은 음식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설날, 추석에 친척들이 모이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가방을 들고 집에 하나 둘 모여,

가장 어린 우리 형제는 어느 세월에 졸업 시킬 것인지, 언제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갈 것인지

매번 비슷한 주제에 얘기를 나눴고

친척 형, 누나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던지, 좋은 회사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던지

자식 자랑을 하는 것이 보통의 대화주제였다. 그 때 나는 고작 중학생이었다.

집으로, 사는 동네로 무시 받을 때면 기필코 꼭 콧대를 꺾어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고는 친척들 다 떠난 집에서

혼자 속 앓이 하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성실했다.

한 회사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하고 계신다.

매일 아침 새벽 5시에 출근하는 것을 잠결에 보았고, 아파서 출근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친척도 같이 회사에서 일할 정도로 아버지는 회사 내에서 신뢰도 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회사 내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이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회사에 다닌 후 그러니까 7,8년 정도 되었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급여, 근태, 대우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40년의 경력에 무색하게 월급은 300을 넘지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와 함께 회사에 근무하던 친척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몇 십년간 묵인하였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버지의 성실함만으로는 친척들처럼 좋은 집, 좋은 차를 살 수 없었던 이유이다.


아버지 회사의 부당함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친척들의 태도였다.

가족, 형제의 부당함을 알고도 묵인할 수 있을꺼라는 생각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친척들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가족이라고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동시에 아버지를 한심해 하면서 말이다.


내가 열심히 살아온 이유 중 분명한 한 가지는 친척들에 대한 복수였다.

어린시절 우리 가족을 무시했던 친척들에게 더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고,

더 좋은 대학교를 나왔고, 무시 당하지 않겠다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내 소식이 흘러흘러 친척들에게 전달 되었을 때는 그 표정을 직접 보고 싶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들보다 더 좋은 회사에서 대우를 받고 일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무시받을 일이 없어질 때쯤 친척들은 명절에도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나의 어린시절 부터 쌓여왔던 화, 복수심이 친척과 가족을 분리하게 만들었다.

친척이 더 이상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의를 차리지 않거나나 이를 직접접으로 표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그 마음이 나를 더 열심히 살게 만들었고 더 성실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복수는 나를 무시했던 사람보다 더 잘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 복수의 대상이 가족이라고 불릴 수도 있던 친척일 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들에게 결과로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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