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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Sep 01. 2022

외롭던 삶을 물려줄지 모른다는 불안함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앉혀놓고 얘기했다.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아 치료하는 동안 우리가 잠깐 이모네 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렸던 우리 형제는 단순했던 것인지, 감각이 무딘 것인지 그 사실을 크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이다.


어머니가 열세 살 정도였을 때에 친부모님을 모두 잃으셨다. 같이 살았던 가족들은 잃어버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할머니 손에서 집안일을 하며 자라셨다.

집안일을 하면서 자랐다고 얘기하지만 가끔 과거 얘기를 들을 때면 식모 대하는 것과 다를 것 없던 삶이었다.

먹지도 않았던 바나나를 가지고 생 사람을 쥐 잡듯이 잡혔던 일화나,

결혼하시기 전인 35살까지 집안일을 시키면서 이빨 한 번 치료를 못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절로 화가 치솟았다.

결국 결혼 전에 이빨이 다 무너져 결혼하면서 아버지가 이빨을 모두 고쳐줬다던 일화도 들었다.

어머니가 울먹이면서 말씀하셨던 이야기라 이런 얘기들은 10년이 더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할머니라며 내가 취업을 하기 전까지 꾸준히 할머니 집에 데려가셨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할머니구나 하고 재롱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과거를 알게 된 고등학생 때부터는 가지 않게 되었고,

취업을 한 이후에는 전혀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도저히 할머니 앞에서 웃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과 내 표정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도 나의 속마음을 알았는지 더는 데려가려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에게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기억은 너무도 힘들었던 삶으로 남아있다.

가끔 우리 형제를 앉혀놓고 눈물 흘리며 서럽던 과거 시절을 얘기하셨던 걸 떠올려보면

얼마나 지워지지 않는 서럽던 기억이었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꾸준히 전화드렸다.

키워주신 것에 대한 예의는 지키겠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진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가 13살이었고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 내가 13살 정도가 되었다.

부모 없던 삶을 살았던 어머니였기에 우리 형제도 그렇게 만들지 모른다는 마음에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너무 많이도 슬퍼하셨었다.

우리 형제가 이모네 집에 잠깐 살게 되었던 그즈음에,

어머니 없이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려 하셨고 우리가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지 않길 원하셨다.


다행히도 암은 잘 치료하셨지만, 그 이후로 정말 없는 형편에도 우리 형제에게 못해주는 것 없이

키우려고 하셨다. 그때는 이 마음을 익히 알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무서웠던 것은

혼자 살아온 힘들었던 삶을 자식에게 반복시킬지 모른다는 불안함이었다.

그 전에 행복을 넉넉히 챙겨주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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