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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e Aug 28. 2023

한국의 교직을 떠납니다.

퇴직은 새로운 시작

Retirement is not the end of the road. It is the beginning of the open highway.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지난번 글은 두 달 만에 썼는데, 그 이후로 석 달만에 브런치 글을 쓰고 있다. 내게 자비를 너무 많이 베풀었다. 글을 쓰지 못한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 미국 남부에서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올여름 방학을 몬태나에서 보내고 왔다. 팬데믹 이전의 3년이라는 시간을 몬태나에서 보낼 수 있었던 건 정말이지 크나 큰 행운이었다. 팬데믹은 사람들에게 조심성을, 사회에겐 폐쇄성이라는 상처를 주었지만 그 이전에 사귀었던 몬태나 친구들은 예전 그대로였다.


몬태나 방문 이후에는 한국어 교사 연수를 받기 위해 오하이오의 한 대학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한국어, 중국어, 아랍어 선생님 서른 명이 모여서 각자의 언어에 대한 수업을 하고 또 들으며 동고동락한 시간이었다. 그때 새롭게 사귄 교수님과 선생님들은 나의 미국 생활에서 큰 인적 자산이 되었다. 지금도 수시로 카톡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근황과 정보를 나누며 지낸다.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동료 선생님들이 새롭게 생겨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여름 동안 있었던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명예퇴직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정들었던 한국의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에서 연구원으로서 활동했던 파견교사 1년의 기간을 포함하여 18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그중 9년은 석박사 생활과 겸했다. 교직생활 중 10년 정도는 퇴근 후 또는 방학 중에 대학교 및 대학원 시간 강사일도 하면서 지냈다. 어찌저찌하여 승진 점수도 거의 다 채워놓은 상태였다. 나의 교직생활을 되돌아보니 그야말로 한국의 교직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와서 육아휴직 3년, 동반휴직 3년 그리고 6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다행히 명예퇴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휴직 기간을 모두 포함하여 교직 경력 총 24.5년. 반의 반백 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내 마음을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시원 섭섭, 영어로 표현하자면 bittersweet이랄까. 당초 계획은 미국에서 몇 년 살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교직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퇴직을 결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작년 여름, 팬데믹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방문을 했다. 비자 연장, 건강 검진, 부모님 찾아뵙기 등 할 일이 많았다. 팬데믹이 다소 느슨해질 때였기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많았고 미국 대사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자 연장을 해야 다시 미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비자 인터뷰 예약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홈페이지 연결이 원활치 않아 몇 번의 도전 끝에 미국 대사관 예약이 가능했고 그것 만으로 몇 주가 걸렸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는 동반 휴직 중에 한국 방문이 너무 길어진다며 비자 업무가 끝나는 대로 바로 출국하라는 말씀을 전했다. 동반 휴직은 배우자의 해외근무라는 사유로 받은 것이니 2주 정도의 한국 방문만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휴직 사유에 맞게 해외에 머물러야 맞다는 것이었다. 휴직 교사는 그 사유에 맞게 지내야 한다는 논리가 맞긴 하지만, 해외 다른 나라는 마음대로 갈 수 있되 한국 방문은 보름 정도만 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었다. 이제 퇴직했으니 내년 여름에 여유롭게 한국에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기간 동안 남편도 한국에서의 재취업을 타진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한국에서의 취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학벌도 실력도 아닌 나이였다. 미국에서는 마흔 중반에 새로운 직장을 잡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는 너무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직전 직업에 걸맞은 일을 찾는 것은 더 힘들어 보였다. 이제는 남편이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한 상황에서 나도 한국어 가르치는 일로 새 출발을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 방문을 길게 하고자, 미국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일을 해 보고자 오랜 심사숙고 끝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그리고 운 좋게 명예 퇴직자 명단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명퇴가 결정될 무렵 한국의 학교에서는 엄청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후배 교사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한국의 교직을 너무도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마저 들었다. 추모의 현장에 가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음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내가 휴직하기 직전에도 한국의 학교는 여러 가지로 위태로운 징조가 보였다. 어떻게든 승진을 하려는 일부 선생님들의 모습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았고, 수업에 힘을 써야 할 선생님들은 각종 행정업무와 민원에 시달릴 때가 많았다. 담임교사는 학급 관리와 맡은 행정 업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휴직 후 복직을 한 내 친구 교사는 학교 폭력 업무를 맡은 이후 공황이 생겼고, 정년을 몇 년 앞둔 한 선배 선생님도 교원 평가 및 장학사 방문을 앞두고 정신병이 발병하여 결국 학교를 떠나시는 걸 옆에서 보았다.


중년의 나이에 한국을 떠난 우리 부부는 결국 미국에서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한국의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열심히 교직생활을 했던 내 모습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미국에서 펼쳐질 나의 새로운 교직생활에서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는 않지만 바라는 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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