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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Mar 23. 2021

덴비 골프장의 스코어보드

내가 사랑한 것들 10

10. 덴비 골프장의 스코어보드


마을 한가운데에 백 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골프장이 있었다. 그린 바로 옆에 누군가의 집이 있고 어떤 홀은 도로로 바로 연결되었다. 연간 회원료가 우리나라 돈으로 채 40만 원이 될까? 회비만 내면 하루하루가 공짜인 셈이었다. 1회 골프 비용이 보통 20만원을 훌쩍 넘는 우리나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뉴질랜드 북섬 동쪽 해변에 있는 작은 도시 왕가레이 이야기다. 2018년 11월 나는 그곳에서 골프를 배웠다.      



살아보니 인생에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는 특히 골프가 그렇다. 20대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인생의 전반에 걸쳐 나는 골프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배격파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일단 그딴 게 스포츠냐는 것. 축구, 야구, 배, 농구  대부분의 구기 종목은 얼마나 역동적인가? 땅에 놓인 공을 막대기로 치는 게 무슨 스포츠라고 할 수 있나? 어릴 때 배구, 그것도 주전 세터를 한 사람으로서 골프는 스포츠로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음으로 (평소에 딱히 환경친화적인 활동을 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 지점에 오면) 나는 골수 환경주의자가 되었다. 골프장을 짓느라 생기는 산림의 황폐화, 잔디 관리를 위해 뿌리는 온갖 독성 농약으로 인한 수질 환경 오염, 골프는 환경을 파괴하는 몹쓸 것이었다.     


그리고 문화적 이슈. 정치인, 경제인들의 ‘골프회동’으로 인한 부정적 이미지. 골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부르주아적인 꼴불견.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골프는 너무 비싸고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접근성이 어려운 스포츠 등등. 나는 골프를 단 일 점이라도 존중할 수 없는 상대라도 되는 양 대접했다. 마치 조선 시대의 노론과 소론이 서로를 대하듯, 현재의 여와 야가 그러하듯 골프와 나는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숙명의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그런 점에서 나는 SNS에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살아보니 지금 생각은 10년 후 또는 20년 후에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가 변하고 나도 변한다. SNS의 문제는 한 번 써 놓으면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너무나 가혹하다. 10년 후에 누군가가 옛날에 내가 쓴 SNS를 찾아서 옛날에 저랬으면서 왜 이제는 이러냐고 따져 묻는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등골에 땀이 흐른다. 홍상수 감독 영화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변명해봐야 요즘 세상에선 그냥 넘어가지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골프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났다. 그 삼 년 동안 나는 하루라도 빈 스윙을 안 하면 좀이 쑤셨고 매일 골프 채널을 보고 좋아하는 선수들의 기사를 찾아보았다. 과거와 현재의 전설적인 선수들의 광팬이 되었다. 지금은 자세만 보아도 어떤 프로인지 맞출 수 있는 괴이한 경지에 올랐다. 골프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뒷모습만 보아도 어떤 선수인지 맞출 수 있는 신기한 눈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게 무슨 스포츠냐고 비난하던 사람이 골프 만의 드라마를 예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수를 공격하다가 예수의 첫번째 추종자가 되어버린 사도 바울처럼 나도 골프를 공격하다가 골프에 빠져버린 매니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4년이 넘게 걸렸던 나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작이 끝나갈 무렵이었던 2018년 늦봄. K모 선배가 나를 불렀다. 회사 인근의 모 스크린 골프장. 돌이켜보면 그는 기독교의 복음을 선교하는 신도 같은 사명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선배는 툭툭 가볍게 골프채를 휘둘러 공을 맞추어 보냈다.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해보니 웬걸. 가만히 땅에 놓여 있는 공을 나는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다. 이래 봬도 왕년에 주전 배구선수 출신이다. 자존심에 살짝 스크래치. 한 시간이 지나도 나는 영 그놈의 공을 타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골프를 하는 모든 사람이 말한다. 잘 되었으면 골프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렇게 해서 나의 골프 인생이 시작되었다.     


다니던 스포츠클럽에서 골프 코스를 새로 신청해 새벽반으로 레슨을 받았다. 골프를 시작하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도 금이 간 갈비뼈와 등과 어깨의 근육통으로 몸살을 앓았다. 초보 골퍼가 걸린다는 손가락 터널 증후군도 생겼다. 그래도 석 달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갔다. 도대체 왜 이런 몰입이 가능한 거였을까?     


돌이켜 보면 나는 본능적으로 몰입을 찾았던 것 같다. 첫 번째 영화가 끝난 후 지독한 상실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살았었다. 아니 작업이 끝날 때마다 그런 증후군이 있었다. 한 작업이 끝나길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끝나고 나면 허전함에 뒤척인다. 그것이 아마도 창작자의 숙명일 것이다. 이번 영화가 끝나고 필연적처럼 닥쳐올 상실감을 골프는 예방해주었다. 골프는 놀랍게도 그 허함을 채워주는 강력한 몰입을 주었던 것이다.    

 


급기야 나는 골프를 배우기 위한 휴가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 무슨 저질 반전 드라마란 말인가? 내 두 번째 영화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개봉하기로 잡혔다. 제작은 이미 끝나서 한 달 반 정도 기다림의 시간이 남았다. 영화를 만들던 지난 5년 동안 나는 휴가다운 휴가를 가보지 못했다. 이제 한 달 정도는 휴가를 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과연 어디에서 배울 것인가? 필드 스포츠는 필드에서 배워야지라는게 나의 야심찬 생각이었다. 그런데 국내는 너무 비싸고 필드에서 배울 만한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언뜻 뉴질랜드가 떠올랐다. 


2008년과 2009년 나는 뉴질랜드에서 5개월 정도 촬영을 한 터라 뉴질랜드에 대해 잘 알았다. 우리나라 3배 크기의 땅에 수원시 인구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다. 광활한 초원의 빈 골프장들은 양떼들이 잔디를 먹어서 그린을 관리하는 정도였다. 촬영을 같이했던 뉴질랜드 로케이션 매니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마침 좋은 프로가 마침 자신의 동네 왕가레이로 이민을 왔다는 희소식을 전한다. 그렇게 나의 사부, 권정민 프로를 알게 되었다. 왕가레이는 뉴질랜드 북섬 동북 쪽, 바닷가에 면한 한적한 전원 도시였다. 11월은 남반구 뉴질랜드에서는 여름이 시작하는 시기로 골프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골프 반대자가 골프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겨 버렸다.


내가 멤버로 가입한 덴비 골프장은 마을 한 가운데에 있었다. 작은 오두막 같은 소박한 클럽하우스에는 맥주와 스낵을 팔았다. 간단한 샤워시설 외에 별도의 부대시설도 없었다. 그야말로 마을 주민들의 공동 놀이공간이었고 사교 공간이었다.  오전은 권프로에게 배우면서 홀을 돌았다. 직접 골프백을 끌고 9홀 정도를 돌면 오전이 지나갔다. 시골 동네인지라 예약도 필요 없었다. 오는 순서대로 그냥 플레이하면 된다. 내가 레슨을 받으며 한땀 한땀 치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할머니 부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사막의 롬멜 부대처럼 놀라운 속도로 진격해와 우리를 추월하고 또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다. 또 잠시 뒤면 할아버지 부대들이 나타나 사라져간 할머니 부대들을 추격이라도 하듯이 우리를 추월해갔다. 그들에겐 골프가 점수 내는 경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육상스포츠에 가까워 보였다. 오전은 거의 이렇게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권프로가 학교로 레슨을 가면 나는 혼자서 또 오후의 9홀을 돌았다. 후반 9홀엔 대체로 아무도 없었다(할머니 할아버지 부대들의 격전지는 주로 전반 9홀이었다). 바닥에 놓여 있는 지름 4㎝ 남짓한 작은 공과 나 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지구의 어딘가에서 나 혼자만이 작은 공을 상대로 진지한 게임을 펼치고 있는것이었다. 오후 3시의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골프장을 나는 좋아했다. 높은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 간간이 울리는 공 맞는 소리 외엔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다였다. 피곤해지면 나는 골프장 나무 아래에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 몸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맑아질 수가 없었다. 몰입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겪어보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     


나중에 권프로에게 들어보니 왕가레이 교민들 사이에서 내기를 했다는 후문이다. 저 사람 일주일만 저러다 말 거야. 사람이 어찌 매일 골프만 할 수 있겠어? 몸이 고생이지. 여행도 좀 다니겠지. 나는 그들의 기대(?)에 반하여 권프로의 아이들과 하루 온천 여행을 다녀온 날 빼고는 매일 골프를 했다. 그 한 달의 하루하루가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소중했다.         



내 책장 한켠에는 자석에 매달려 있는 골프스코어보드가 있다. 덴비 골프장에서 가져온 스코어보드다. 지금도 일이 안 풀리거나 우울할 때는 그 스코어보드를 손에 쥐어 본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의 티켓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가 그때처럼 아무 생각없이 마음껏 공을 칠 수 있으리라. 작은 종이 한 장이 그런 위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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