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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Mar 30. 2021

태양의 서커스 브로셔

내가 사랑한 것들 11

11. 태양의 서커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 어린 왕자     


라스베가스에 가서 1달러라도 갬블링을 하고 오지 않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호텔 로비가 카지노로 되어 있어 여행가방을 끌고 로비를 통과해 체크 인하러 가는 길에서부터 고객들을 유혹한다. 체크 아웃을 하고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 베팅을 하는 사람도 흔히 보게 된다. 어쩌다 보니 라스베가스에서 갬블링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쪽에 나는 줄을 서게 되었다.      


O Show

2013년 9월 LA에서 두 달여 머무는 사이, 나는 며칠 시간을 내어 라스베가스로 떠났다. 오직 태양의 서커스 공연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이태 전 도쿄 디즈니랜드 쪽에 있는 전용 극장에서 태양의 서커스 공연 하나를 보았었다. 서커스와 무대 공연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게 하는 잊을 수 없는 공연 체험이었다. 그 이후 태양의 서커스 공연장이 있는 도시라면 그곳을 방문하게 될 때 꼭 찾아가 보리라 결심을 했었다. 그래서 LA에서도 할리우드 극장에서 하는 태양의 서커스를 보러 갔지만 전용극장이 아니어서 그런지 기대만 못 했다. 가장 좋은 공연들은 라스베가스에 있다고 해서 원래 생각에 없었던 라스베가스로 가기로 했다.      


LA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5시간의 여로는 대부분 황량한 사막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막의 풍경에  중동의 사막들이 겹쳐졌다. 2002년 다큐멘터리 <문자>를 촬영하러 중동에 갔을 때 만났던 사막들. 사막은 우리의 심연을 보게 한다. 풀도 나무도 없는 빈 공백이 우리 존재의 저 깊은 어딘가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문명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들의 근거가 사실은 그렇게 튼튼하지 않다는 것을, 언젠가는 다시 이 사막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바그다드의 유적지에서 알 수 있었다. 3천 년을 번성했던 도시가 강물의 흐름이 바뀌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인간이 애써 발굴해낸 흙무더기로 조잡하게 꾸며 놓은 유적지 외에 그곳이 아라비안나이트의 꿈의 도시였다는 것을 알아볼 길이 없었다.     


데쓰벨리를 지나자 라스베가스가 저 멀리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불모의 사막 위에 쌓아 올린 저 묘한 공간을 어떤 이는 인간 문명의 승리라고 떠들 것이고 어떤 이는 헛된 욕망의 도시라고 폄훼할 것이다. 도시는 짝퉁의 집합소 같았다. 그곳엔 파리도 있고, 이집트도 있고, 베니스도 있었다. 에펠탑이 있고, 피라미드가 있고, 자유의 여신상도 있었다. 연극 무대의 가벽처럼 뒷면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놀이 공원이 아니라 놀이 도시를 만든 미국인들의 창의성(?)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게임을 하러 온 것은 아니어서 낮에는 호텔의 야외 풀 벤치에서 책을 보며 쉬고 저녁이 되면 어슬렁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하루 저녁에 한 편씩 태양의 서커스를 보았다. 태양의 서커스는 사양길에 접어든 서커스 산업을 파괴적 혁신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의 서커스이다. 기존 서커스의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던 동물들을 과감하게 없애고 첨단 기계공학과 무대 장치, 수준 높은 스토리텔링, 발레와 무용 같은 고급 예술을 접목하여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차원 높은 ‘아트 서커스’를 만들어내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총 18편의 작품들은 모두 다르고 또 모두 새로운 도전이었다.      


O Show

내가 제일 기대한 쇼는 ‘오’ 쇼였다. 오쇼는 벨라지오 호텔의 태양의 서커스 전용극장에서 볼 수 있다. 호텔과 태양의 서커스가 결합해서 그 호텔에서만 볼 수 있는 쇼를 만들어낸 것이 라스베가스의 탁월한 전략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 쇼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벨라지오의 유명한 분수 쇼에 영감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오 쇼는 물을 테마로 만든 쇼였다. 20m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붉은 커튼이 열리자 물로 가득 채워진 무대가 나타났다. 그윽한 안개 속에 공중에 매달려 있던 배우들이 인어처럼 바닥의 물로 다이빙을 했다. 절로 탄성이 나오는 아찔한 다이빙! 배우들은 물속으로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후 거짓말처럼 물이 사라지고 마른 바닥이 등장했다. 아름다운 불의 쇼가 이어지고 불은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바다 위의 하늘로 투명한 배가 떠오르고 선원들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회전목마와 광대들이 꿈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니다 꿈처럼 사라졌다. 14세기 유럽의 공연장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무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눈으로 보되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2시간이었다.      


O Show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동선은 공연관련 기념품 가게로 자연스레 연결이 된다. 공연을 찬찬히 영상으로 보고 싶어 가게에서 물어보니 공연 영상은 팔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공연 메이킹 DVD가 있어서 브로셔와 같이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메이킹 DVD로 보니 6백만 리터의 물이 채워져 있다는 수조로 된 무대 밑에는 공기통을 맨 스쿠버다이버들이 물로 뛰어든 배우들에게 호흡기를 채워주고 있었다. 2년에 걸쳐 기획, 제작된 공연의 치밀함을 알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이 DVD에 소개되어 있었다. 오쇼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라스베가스로 와야 한다. 나는 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라스베가스로 올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쇼를 보고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이 사막을 아름답게 만드는 샘이었던 것이다. 


KA Show

다음날은 MGM 그랜드 호텔의 KA 쇼를 보았다. 기계장치와 무대가 압권인 공연이었다. 땅이 움직이고 절벽 아래로 거대한 모래가 쏟아졌다. 모랫바닥과 절벽 그리고 하늘에서 펼쳐지는 모험 액션활극. 이 기계와 모래들은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던 것도 잠시 나는 극의 전개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는 인간의 몸짓과 그것이 불러오는 아찔한 감동의 순간들. 카 쇼는 그런 찬란한 순간들이 명멸하는 드라마였다.      


LOVE

그다음은 미라지 호텔의 LOVE. 비틀즈의 노래들로만 연결하여 스토리를 만들어 낸 이 공연은 발상도 참신했지만 노래 하나하나를 살리는 무대와 장치들이 창의적이고 놀라웠다. 앞의 두 공연과 다르게 객석 한가운데에 원형으로 된 무대와 첨단 조명과 사운드가 넋을 잃게 만들었다. 현재까지 제작된 가장 복잡한 오디오 시스템 중 하나라는 러브 시어터의 6,400개에 달하는 스피커가 놀라운 음질의 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해주었다.     


LOVE

그 외 ZUMANITY. 인간의 성과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새로운 서커스. 성과 사랑도 공연 예술로 훌륭하게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샤 리아르 왕처럼 라스베가스의 매일 밤을 나는 태양의 서커스를 보면서 지냈다. 이 쇼들의 장면들이 내 영혼의 혈관 속으로 스며들기를 , 내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바라며. 

지금도 눈을 감으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투명한 배와 회전목마, 물로 뛰어드는 인어들, 사막을 거슬러 오르는 인간들이 선연히 떠오른다. 그것은 중력과 물리 법칙을 넘어서 꿈과 상상의 세계에 도전해가는 인간의 처연하고 아름다운 시지프스적인 몸짓들이었다.   



   

ps. 코로나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보호신청을 냈다는 작년 기사를 보았다. 너무나 마음이 아렸다. 이 지구라는 사막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던 하나의 오아시스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고 그들의 아름다운 도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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