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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Apr 13. 2021

마이애미의 빵 쿠오티딘
Le Pain Quotidie

내가 사랑한 것들 12

12. 마이애미의 빵 쿠오티딘(Le Pain Quotidien)     


‘우리는 길을 잃고 세상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찾기 시작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길을 잃었다. 동네 산책 겸 메트로가 어디 있는지 확인차 나선 길이었다. 새벽에 잠을 깨니 내가 어디 있는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여기까지 온 긴 여정을 떠올렸다. 2018년2월. 인천에서 달라스 텍사스를 경유하여 마이애미까지, 18시간의 긴 여정. 일주일간의 애니메이션 컨퍼런스에 참석차 마이애미에 온 길이었다.      



내가 빌린 집은 코코넛 그로브라는 뭔가 아늑한 이름을 가진 동네에 있었다. 이름답게 아름답고 울창한 코코넛 숲 안에 있는 마을을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이번 출장에도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찾았다. 컨퍼런스가 열리는 시내는 숙박료가 너무 비쌌고 일주일간을 호텔에서 지내기도 싫어 좀 멀더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찾았다. 가격도 시내 호텔가의 절반이었고, 걸어서 메트로로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 이동도 크게 불편해보이지 않았다. 


   

구글맵을 보면 메트로까지 VIRGINIA AVE를 따라가면 된다. 머리는 무거웠지만 길을 나섰다. 어딘가 낯선 곳에 가면 제일 먼저 '나와바리'를 확인하는 게 내 오랜 습성이다. 커다란 열대 나무숲 같은 동네가 낯설면서 신기했다. 이 동네의 집들은 땅에 심으면 나무처럼 저절로 자라는 것은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는 어떻게 저 커다란 나무들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면서 길을 나섰다. 일요일 아침이라 더 한갓진 골목들. 극장이 있는 작은 몰을 지나 큰길로 나왔는데 내가 생각한 메트로로 가는 곳이 없었다. 이상해서 지도를 보니 방향을 거꾸로 잡은 모양이었다. 낯선 동네에선 남북이 헛갈린다.     



때론 길을 잃은 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몰랐을 수도 있는 바닷가로 가는 길을 찾았다. 언덕 아래로 남국의 싱그러운 바다가 보였다. 어차피 정해진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공식 일정은 내일부터 시작이었고, 오늘은 좀 느긋하게 보내도 되었다. 나는 바다를 향해 걸었다. 독특한 인테리어를 한 타투 가게, 커다란 사자인형이 앉아 있는 아트숍 등 재밌는 가게들을 지나는 재미가 있었다. 길은 의외로 간단하지 않아서 나는 계속 길을 잃었고 그때마다 행인에게 길을 물어야 했다. 열대 수목이 우아하게 조성된 피콕 파크를 지나 바다가 눈에 바로 들어오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물반 요트반이라고 해야 할까. 규모가 잘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보트와 요트들이 무수한 겹으로 정박해 있는 마리나였다. 남불이나 지중해의 해변에서 보는 느낌과는 다른 미국만의 느낌. 뭔가 압도적으로 물질적인 부의 집합에 묘한 느낌을 받으며 일요일 아침의 한가한 해변을 걸었다. 해변 공원 저쪽 콘도 빌딩 위를 커다란 매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해변이면 갈매기가 당연한 거 아닌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아니고 난데 없는 매의 출현에 잠깐 당황했다.  

   

마리나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반가운 곳이 눈에 띄었다. 빵 쿠오티딘. 뉴욕에 있을 때 좋아했던 카페였다. 미국은 생각보다 카페가 많지 않다. 이 나라 사람들은 밥을 먹고 그 자리에서 디저트나 커피를 마시지 우리처럼 2차로 커피를 마시러 가지 않는다. 그래서 커피만 마시기 위한 카페를 찾기가 어렵다. 스타벅스가 그런 점에서 혁신적이었겠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고 현지에선 막상 지저분하고 복잡하다. 빵 쿠오티딘은 카페 중 좀 더 고급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코코넛그로브의 빵 쿠오티딘은 커다란 나무 옆에 2층으로 된 목가적인 카페였다. 레귤러 커피와 쵸코 아몬드 빵을 주문하고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자전거족과 조깅족이 경쟁하듯 번갈아 길을 차지했다. 일요일 아침을 상징하는 출연자들이다. 평소에 아무 관심이 없었을 그들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새삼 그들이 누구일까 궁금해졌고 그들의 인생에 관심이 생겼다.      



얼마전 ‘오버뷰 효과’(Overview Effect)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주로 간 사람들이 대기권 밖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며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작고 푸른 공 같은 지구를 보며 자신과 인류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산꼭대기에서 우리가 사는 마을을 내려다보아도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던가? 그 작은 세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가 가여워지는 그 순간 말이다. 하물며 우주에서 작은 지구를 내려다본다면 어떨까?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감정과 인식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와 비슷하게 여행도 ‘여행자 효과’라는 게 있지 않을까?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크고 작은 성찰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떠오르는 대로 글을 끄적여보았다.     

우리 인생도 큰 틀에서 보자면 하나의 여행이다. 

인생을 여행자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 보고 지나가는 풍경은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다.

예산이나 사정이 가능한 대로 최대한 좋은 곳을 보고 좋은 것을 먹을지어다.

무엇을 아끼랴.

사람을 그리워할 것이고, 인생에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에 대해 숙연해질 것이다.

고독에 익숙해질 거고 

그래서 우리는 혼자이며 혼자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달콤씁쓸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유한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나. 우리. 여기 잠시 있다 다른 곳으로 간다. 여행이다.

나. 우리. 여기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인생이다.

무엇이 다른가?

영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영속한다면 무엇이 가치가 있을까?

우리는 유한하므로 가치를 찾고 부여한다.

신의 세계에는 어떤 의미도 없을 것이다.

영원은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게 만든다.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중 아주 작은 것을 보고 느끼고 지나가는 여행자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아가씨들. 

눈부신 젊음들. 

해변을 산책하는 주인과 개. 

입에 문 공을 뽐내는 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일요일의 시민들. 

그리고

요트. 

저 많은 요트를 보며 잠시 든 생각.

내 인생은 저 요트를 타고 휴일을 보내볼 생각조차 못해본 초라한 인생이었을까?

저 수 많은 요트들로 상징되는 것에 비해 내 삶은 무엇이었을까?

지상에서 그만한 부를 일구진 못했다.

아직 그만한 명성도 명예의 탑도 쌓지 못했다.

그래도 세상의 많은 곳을 누구 못지않게 여행했고,

많은 것을 보고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인간 중에 이만한 경험이 쉽지는 않을 거다.

여행은 인생을 다시 보게 해주고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여행자의 눈으로 인생을 보자.     


           - 2018년 2월 어느 일요일. 마이애미 코코넛그로브에서     


길을 잃은 덕분에 일요일 아침 마이애미에서 한 조각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 후한 팁을 자리에 두고 나왔다. 가끔 길을 잃는 것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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