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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Apr 19. 2021

버지니아 워터 호수

내가 사랑한 것들 13

13. 버지니아 워터 호수     


그날이 기이한 날이 될 거라는 아무런 징조는 없었다. 여느 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까마귀가 창문에 와서 울고 갔다거나, 검은 고양이가 골목에서 난데없이 나타나 사라졌다거나 하는, 돌이켜봐서 이게 전조였었구나라고 갖다 붙일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는 그저 태평한 날이었다. 날씨가 좋았다는 것이 어쩌면 특이할 수도 있기는 하겠다. 매일 사계절이 있는 영국에서 그날은 드물게 종일 화창한 날이었다.      



그렇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내가 유학을 다닌 영국 시절이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런던 워털루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40분 정도 가면 나오는 써리Surrey 지역의 에감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써리는 영화 <전망좋은 방>의 무대가 된 곳으로 전형적인 영국의 전원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지금도 한다하는 작가들이 ‘깊어가는 가을날 써리에서’ 같은 글로 서문을 마무리하는 게 클리셰가 될 정도로 영국의 귀족들이나 작가들에게 사랑받는 지역이다. 학교는 에감역에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간 엥글필드 그린이라는 언덕배기에 있었고, 나는 학교 정문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집을 구했다.      


엥글필드 그린 50번지. 큰 길가의 가게 몇 개와 몇 개의 펍 밖에 없는 그야말로 한적한 전원마을이었다. 얼마나 한적한 곳인지 지난해 가을에는 심지어 마을의 공터에 유랑 놀이공원이 왔다 가기도 했다. 주변에 볼 거라고는 엘프와 드워프가 나올 법한 깊고 원시적인 나무숲, 버지니아 워터 호수, 윈저 그레이트 파크 등 대자연이 다였다. 나는 대체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즐길 문화도 별로 없어서 사무치게 외로웠지만, 곧 그 생활의 장점을 찾아내었다. 언제 이런 대자연에서 살아보랴. 그런 자연과 함께 살아보는 것도 평생 다시 누려보기 어려운 사치이리라. 어느새 나는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대자연 속으로 다니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일과라고 할 만큼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고 쏘다녔다.     



어느덧 4월로 접어든 영국의 봄. 수업을 듣고 난 오후,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중국산 자전거로 제일 싸고 튼튼해 보이는 놈으로 유학 초기 자전거포에서 업어 왔었다. 푸른색 바디가 어쩐지 폴이란 이름과 어울려 보여서 자전거의 이름은 폴이 되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폴은 기어가 많지 않아 언덕이 많은 엥글필드 그린에선 언덕을 오를 때 애를 많이 먹기는 했다.      



오후 네 시쯤이나 되었을까? 늘 다니던 길로 폴을 몰고 갔다. 집 앞의 마을 공동묘지를 지나 마을 끝의 펍을 지났다. 공터에는 흰 스웨터를 입고 크리켓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크리켓이라고 또 특별할 건 없다. 영국에 살다 보면 야구 캐치볼을 하거나 길거리에서 농구하는 애들처럼 흔하게 보는 장면이다. 얘들이 입고 있는 흰 스웨터가 귀족적으로 보일 뿐인 것이다. 이 공터에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웬만한 지방 소도시 타운만 한 윈저 그레이트 파크가 나온다. 어느새 그림자가 길어지고 등을 밀어주는 순한 바람이 불어와 페달을 밟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깊은 숲속에선 큰 사슴들이 풀을 뜯고 있고, 초록빛 앵무새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큰 나무 주위를 날아다녔다. 거대한 나무들의 숲을 지나 저 아래로 버지니아 워터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둘레 5-6킬로미터. 해리 포터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이 나의 최종 목적지였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돌아가면 또 오늘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갈 터였다. 그때까지도 기이한 일이 일어날 아무런 조짐은 없었다. 그저 맑고 서늘한 저녁 바람이 그때까지 달려온 피로감을 씻어줄 뿐이었다.      



버지니아 워터 호수는 내가 특별히 좋아한 곳이었다. 원시적인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에서 공룡이 나타나고 신화 속의 괴물이 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혼자 상상하곤 했다. 호수는 그만큼 넓었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매력을 감추고 있어 보였다. 버지니아 워터 호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고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호숫가 따라 난 길을 오분여 쯤 달렸다.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났다. 멀리서 수달인지 족제비인지 모를 작은 맹수 한 놈이 백조를 공격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놈은 후다닥 도망갔다. 백조는 움직이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자전거에서 내려 백조 쪽으로 다가갔다. 백조는 나를 피해 움직일 힘도 없어 보였다. 어쩌나? 난감했다. 백조는 영국에서 국조라고 할 만큼 중요한 새였다. 영국 여왕의 상징 같은 존재. 백조에게 돌을 던지거나 해를 끼치면 영구추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될 수 있으면 가까이 가지 않고 멀찍이서 보려고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 맹수에게 공격받고 위험에 처한 백조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 순간 영국 여왕을 위해서 백조를 구해야지 하는 기사도 정신 어쩌고 하는 생각 따위는 맹세코 들지 않았다. 그저 생명이 위급해진 불쌍한 생물체를 그냥 두고 갈 수 없는 사마리아인의 연민이 들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깊은 자연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반대편에서 유모차를 끌고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내 얘기를 들은 아주머니는 호수 끝 버지니아 워터 마을로 가는 곳에 야생동물보호센터가 있다고 했다. 다친 백조를 두고 거기까지 다녀오자니 백조가 너무 위험해 보였고 데리고 가자니 방법이 난감했다. 폴의 뒤 짐칸은 작아서 백조를 올려놓기도 마땅하지 않은 데다 녀석은 스스로 버틸 힘도 없어 보였다. 내가 한 손으로 안고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무래도 녀석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백조를 한번 안아 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녀석은 거부하지 않고 내 손에 안겼다. 가끔 길고양이도 아프거나 목숨이 위급할 때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가온다고 하지 않던가? 백조는 내가 자신을 도와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그 커다란 녀석을 안아 올렸다. 녀석은 내 팔에 곱게 안겨 왔다.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발버둥 치지도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녀석을 안은 채 페달을 밟았다.      


가끔 마주치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상황을 알아보고 마치 성화 봉송을 하는 주자이기라도 한 양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 상처 입은 백조 한 마리와 동양인 남자 한 쌍의 기묘한 조합은 그렇게 한 이십 여분을 더 달렸다. 백조는 내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의식을 잃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평소에 잠깐 멈춰 둘러보기 좋아하던 호수 변의 고대 로마 유적지도, 언덕 위의 아름다운 저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페달을 빨리 밟아 야생동물보호센터까지 갈 생각뿐이었다. 폴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돈을 아끼느라고 기어비가 낮은 폴을 사 온 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20단이나 되는 날렵한 자전거라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 터였다.     


호수의 반대편에서 버지니아 워터 타운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변에 정말로 야생동물보호센터 WILDLIFE CENTRE가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나는 자전거를 탄 채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건물 밖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이 있었다. 멜빵 청바지를 입은 덩치가 큰 빨강머리 남자였다. 빨강머리는 급히 앰뷸런스를 불렀다. 나는 기다렸다가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백조를 보고 야생동물보호센터를 나왔다. 어느새 해는 져서 어둑해진 길이었다. 그래도 백조 한 마리를 살렸다는 마음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좀 전까지 내 팔에 상처 입은 백조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한참 그 기억을 잊고 살다 어제 산책을 하다가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날이 좋은 봄날이라 집을 나섰는데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몰려와 삽시간에 구름 덮인 하늘과 맑은 하늘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 하늘이 영국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에서 늘 보던 하늘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영국 생각을 하다 그날의 백조 생각까지 간 건지 기억의 경로는 나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돌이켜보니 그날도 4월의 봄날이었다. 봄은 다시 생명을 소생시키고 잊어버린 기억도 다시 살려내는 모양이다.      


믿기 어려운 기묘한 이야기지만 이야기는 그게 다다. 놀라운 반전이나 예기치 못한 인과응보는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독자들이 좋아했겠지만 아쉽게도 백조를 도와줬다고 박씨 물고 온 제비의 보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몇 달 뒤 나는 무사히 학교를 마치고 잘 돌아왔을 뿐이다. 그게 특별히 백조의 보은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도 백조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인생의 한순간이 있었다. 그림 같은 호숫가에서 우연히 상처 입은 백조를 만나 구해주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 나 자신도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났던가 싶은 그런 빛바래고 기묘한 기억이긴 하지만. 


버지니아 워터 호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진짜 네스호의 괴물이 나타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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