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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호 Jun 13. 2021

도쿄의 한 무명 예술가

내가 사랑한 것들 20

20. 도쿄의 한 무명 예술가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 중에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별은 몇 개나 될까? 얼마 전 포천으로 캠핑을 갔을 때, 별밤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나는 한 이름없는 작가를 떠올렸다.      



연전에 도쿄 히로오에 갔을 때였다. 히로오는 롯폰기 근처에 있는 힙한 주거 지역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일본 문화와 서양 문화가 자연스레 섞여 있다. 도심 한가운데 아직 오래된 일본식 목조 주택들이 남아 있고,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 식당들이 작은 길과 골목에 많아서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가 다닌 그 성심 여학교가 동네의 언덕 위에 있었다. 걷다 보니 자연스레 그 학교 앞을 지났다. 딱히 방문할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막상 학교가 외부인에게 개방되지 않는다고 하니 왠지 아쉬웠다. 언덕을 돌아 내려오는 모퉁이에 있는 작고 예쁜 카페가 있었다. 많이 걷기도 한 터라 들어가 잠깐 쉬었다 가기로 했다.     

 


차를 주문하고 보니 윈도우와 장식장에 전시된 작은 엽서와 달력, 캔버스 가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룡과 치즈, 와인 등을 소재로 한 다양한 그림들이 프린트된 소품들이었는데, 거기에 그려진 그림들이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주로 공룡들의 일상이다. 벨로시랩터가 치즈톱으로 치즈를 자르고, 수장룡이 바에서 와인을 든 채 옆자리 공룡의 치즈를 훔쳐다 본다. 색소폰을 부는 공룡도 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은 우아하고 섬세하고 위트가 있었다. 십 년째 공룡 영화를 만든 사람으로서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눈에 띄는 공룡 그림이나 소품이 있으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누굴까?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유명한 작가는 아니고 근처에 사는 젊은 작가인데 카페에서 전시를 해준다고 했다.      



그림 밑에 서명된 작가의 이름은 히로사카 유네 Hirosaka Yune. 구글로 검색해봐도 이렇다 할 자료는 없었다. Academai Riaci라는 이탈리아의 작은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흔적 정도가 이 예술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왜 공룡을 그리고 있을까? 공룡은 판타지 아트나 영화나 게임 디지털 아트 작가들이 주로 다루는 소재일 뿐, 주류 예술계에서 공룡을 그리는 작가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다. 그의 그림은 주류 예술계에 속하기도 어렵고 판타지 아트 계에도 속하기 어려운 이상한 경계지역에 있었다. 그가 왜 공룡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히로사카는 어찌 보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길을 혼자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무명의 작가였던 것이다. 


예술계에서 성공한다는 건 상투적인 비유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몇 퍼센트의 성공한 예술가의 그늘에 무명 예술가들의 삶이 가려져 있다.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다. 기회와 운, 노력과 세상의 때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을 때 성공하는 작가가 나온다. 운이 좋으면 어떤 작가는 말년에 이름을 얻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작가는 사후에 이름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영원히 잊힐 것이다. 그럼 과연 이름을 얻지 못한 작가는 불행한 것인가? 나 자신도 수십 년 동안 물어보고 있는 질문이지만 답은 알 수가 없다. 히로사카가 이름을 얻건 말건 나는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였다. 게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신경쓰지 않고 그의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엽서와 달력, 그리고 캔버스 백을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서 카페를 나왔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히로사카의 근황은 제대로 들려오지 않는다. 이제 구글에서는 검색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예술계를 떠난 것일까? 나는 페이스북을 하지 않지만, 혹시 하고 페이스북을 뒤져 보았다. 거기에 그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익숙한 연필과 크레용으로 비슷한 세계를 묵묵히 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반가운 안도감은 뭐라 말하기 어렵다. 과장해보자면, 아직 내가 믿는 세계가 무너지지 않은 느낌이랄까?  기회가 된다면 그와 함께 바에 앉아 그의 공룡들처럼 와인과 치즈를 먹으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그의 날은 많이 남아 있다. 그가 이름을 얻는 작가가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나는 그를 응원한다. 그는 나에게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그와 같은 작가를 대표하는 하나의 별과 같다. 밤하늘은 몇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무수한 별들이 모여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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