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에서 나가 주겠니?
난임휴직 2년 차, 장기 사고자라고 불린다.
시험관 시술이 미뤄지면서 집에서 청소하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얼버무리는 소리)ㅅ ㅓ으ㄴㅇ ㅕㅇ 반장님(내 이름을 모르는 듯하다), 계장이에요. 연락도 안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 해서 그런데 부서에 휴직자가 많아서 나가줘야겠어요.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직원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또 인사지침에 휴직을 길게 하는 사람은 경무과로 가야 하는 게 있어요. 서운할 수도 있는데...."
계장의 전화를 받는 순간 사고가 정지되었다. 휴직 전 부서에서 내 의견, 감정을 전혀 피력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지만 인정받기는커녕 더 착취하거나 무시하는 걸 겪었기 때문에 앞으론 할 말 하리라
결심했건만 그 의지가 무색하게 멍했다.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쫄아드는 버릇은 여전했다.
이 좋지도 않은 상황에 스스로를 낮추며 얼굴도 모르는 상사에게 "네"를 연속 네 번 말하면서
마치 부서에서 쫓겨 나가는 걸 좋아하는 양 알겠다고 하는 나를 보았다. 유체이탈해서 전화를 받는 내 꼴을 멀리서 본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연신 네네네네 굽실대는 꼽등이 같은 비굴한 나를 보니 서글퍼졌다.
"네네네네, 직원들이 힘들다는데 그러셔야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임신하려면 마음이 편해야 해요. 블라블라블라(임신 조언)"
마음이 편해야 한다. 이 말을 듣고 아무 말하지 못하다가 빨리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네네하고 언른 전화를 끊었다. 난 그 계장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 계장은 내가 휴직 중에 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난임 휴직 중인 나한테 저런 조언을 하는 게 참 선을 넘는다 싶어 불편했다.
마치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 어른(거의 남)이 갑자기 명절에 우리 집에 와서는 "왜 결혼을 안 하냐?"
"왜 취업을 못했냐" 잔소리하는 눈치 없는 어른을 만난 것 같았다.
우리 엄마, 시어머니도 내가 혹여 마음 상할까 잘하지 못하는 임신 조언을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상사가
부서에서 내쫓으면서 하는 게 적절한가?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꼴이랄까?
누군가는 "직원들이 힘들다는데 나가라는 걸 아니꼽게 듣는 네가 이상한 거 아니냐?"라고 할 수 있겠다.
난 이 부서의 일을 바삭하게 알고 있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또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일하는 사람은 소수다. 일을 하지 않고 승진을 위한 정치질만 하거나 낮엔 일을 안 하다가
퇴근 무렵부터 일부러 야근하는 것을 일을 열심히 하는 거라고 착각하는 인간, 계속 입으로만 일하는 인간, 상사에게 이간질하는 등등 인간 혐오를 경험한지라 그들이 힘들다는 건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힘들다면 힘든 거니 받아들였다.
"작년엔 휴직해도 부서에 소속되었는데 왜 올해부터 그렇게 된 건가요?"
"부서 휴직자가 몇 명인데 직원들이 많이 힘드신 건가요?"
"휴직자 중에 저만 나가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전에 휴직하면 경무과 소속이었는데 경무과에서 부담스럽다 하여 부서에서 휴직자를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는데 이렇게 경무과 가는 걸로 언제 바뀐 건가요?
그 부서 티오를 잡아먹어 또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요?"라든가 물어볼 말이 많았는데
내가 왜 나가야 하는지 근거 규정이 뭔지도 모른 체 나가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난 나를 변호하지 못하는 바보, 한심한 인간이다.
임신하려면 마음이 편해야 한다는 조언에 분노, 황당함에 나의 고질병인 '입꾹닫'이 발병했다.
굳이 묻질 않고 그냥 삭였던 이유는 경찰생활 9년 동안 윗사람이 시키는걸 토를 달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계급사회다.
일의 이유를 묻거나 해봤자 불평불만이 많은
직원으로 찍힐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묵묵하게 불평 없이 일한 결과 지금 나는 어떠한가?
1. 승진을 하거나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는가?
- NO!! 승진은커녕 알아주는 이 없었다. 오히려 열심히 빨리 일을 처리했는데 일이 떠넘겨 올 뿐
2. 상사, 선배가 선 넘는 말을 하거나 불합리하게 대했을 때 입을 다물었는데 평판이 좋아졌는가?
- 타 부서 사람들을 자주 만나진 않아 내 평판은 잘 모르지만 딱히 좋아진 거 없음, 그냥 만만한 사람
3. 나는 회사생활이 괜찮았는가?
-내 의견, 감정을 다 말할 수 없는 게 조직 생활이라고 하지만 마음에 병이 생김, 불면증, 이상 통증 등
나처럼 그때 그때 잘 못 물어보고 나의 의견이나 감정을 말하지 못해서 집에 가서 이불 킥하고
그런 사람이 또 있을까? 많을까?
바보같이 40살이 다 되도록 말이다.
머릿속으로 "이렇게 받아쳤어야 했는데"라며 시뮬레이션을 하고 나의 억울함을 표현하는 말을 되뇌다가 날이 밝기도 했다. 말해서 불리해질거다 욕먹을 거다 했는데 말을 안해서 병이 생겼다.
원래 나의 의견을 말해야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눈치 보고 알아서 엎드렸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선을 넘어도 된다고 생각해 함부로 했다. 남편은 네가 100을 줬는데 걔네들은 1도 주지 않았으니 네가 힘들 법 하다는 위로를 건넸다. 잘 지내고 싶어 나를 낮추고 배려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한 오산이었다.
복직을 하면 상대방에게 제대로 물어 혼자 추측하지 않고 오해를 줄이고 나도 덜 스트레스받으리라
결심하고 연습했지만 이번 계장의 전화도 입꾹닫과 네 네 네 네로 마무리 되자 스스로에게 너무 화가 났다.
다음날 내가 부서에 물어보고 싶은 것들을 종이에 적어봤다. 사무실에 전화를 하는 건 언제쯤이 좋을까?
한 10시쯤이 적당하겠다 싶어 사무실 번호를 누르고 서무가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떨렸다.
너무 궁금하고 물어볼 데가 없어 연락드린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꼭꼭 눌러쓴 종이를 읽는 티 안 나게 읽으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내가 쫄았다는 걸 보여주면 안 된다. 마치 아나운서 오디션에 참가하는 사람처럼 상냥하고 나긋나긋하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뉘앙스로 질문을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들었다.
통화를 하면서 어느 정도는 그쪽 상황도 이해가 가고 더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난 그 부서에서 오래 일했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안다. 30프로만 일하는데 사람 2~3명쯤 없어도 충분하다. 직원들이 엄청 힘들어한다는 말에 웃음이 났지만 어느 조직이나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한다.
부서 휴직자는 총 3명, K는 출산휴가 중이고 6개월 전 S는 육아휴직 들어갔고 그리고 나처럼 2년 차 휴직 중인 사람은 흔치 않고 장기 사고자라고 부른단다. 대부분 1년 휴직을 하지 너 같은 케이스는 없을 거란다. 자기가 전 경찰청을 조사해본건 아니라 정확하지 않지만이란 단서를 붙였다. 출산 경험이 있는 그 서무는 라테를 시전 하며 나도 육아 휴직 때 그랬어라고 말했다.
꼰대인 서무가 라테 외치는 건 그렇다고 치고 장기사고자? 사고라... 회사에 크게 기대한 건 없다. 난임휴직을 하게 해 준 것만으로 감사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은 뭐고' 사고자'라는 이름을 달더니 저출생 시대에 아이를 낳겠다는데 너처럼 2년을 휴직하는 애는 없어라는 말을 해준다.
시험관 시술해 보셨나요? 하려다가 참았다. 그 서무는 비슷한 나이대 선배로 권력에 순종하고 후배들한테 시어머니 같이 구는 여자로 갑자기 통화 중 자기 아들 중학교 갔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주더니 젊으신데 좋으시겠다고 요즘은 40살에도 애를 낳는데 라며 으레 인사말을 건네자
"야 40살이면 다 늙었는데 뭔 애를 낳아. 내 능력 밖이야"
나 곧 40인데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묻고 싶지만 이건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걸 수도 있다는 자기 검열 신호를 감지하고 마음을 다스린다. 직원 K가 출산 후 3개월만 쉬고 나올 거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럼 휴직자 2명인데 뭐가 그렇게 힘드시나요? 노는 사람 조금 일해도 다 할 만하겠네라는 빈정거림이 나올려한다.
출산 3개월 만에 몸이 다 회복이 되는 게 가능한가? 그게 조직을 위한 건가? 본인 경제적인 이득 때문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 말은 하면 안 좋은 말이다. 그 직원 개인 선택이니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다.
혹시 나같이 할 말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의견과 감정을 조리 있게 표현하면서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기술이야말로 나를 살리는 길이다.
나는 억울한 것이, 선 넘는 행동이 제일 싫은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명확하게 이유를 알아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혹시 회사에서 나와 같은 이유로 힘들다면 자신을 잘 표현하는 의사소통 능력을 같이 키워보자고 힘내자고 말해주고 싶다. 나의 성장 모습을 봐주시고 당신의 성장 모습도 알려주시길 바라본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계장님! 마음이 편해야 임신이 잘 된다는 말은 위로로 하신 것 알겠습니다.
저도 안 좋게만 예민하게만 받지 않겠습니다.
다만 앞으로 임신으로 고생 중인 거 뻔히 알면서 이런 이야기는 후배들한테 삼가 주세요. 아는 척하지 않는 것도 배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