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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퍼즐도사 Feb 26. 2024

내 상처를 돌보려다 만나게 된 심리학 (1)

'심리학도의 내면 탐구 기록' 시작 (1)

중국어 중에 구병성의(久病成医)라는 성어가 있다.

병을 오래 앓으면 그 병의 의사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심리학도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이러하다. 



유치원생일 때의 기억

내 인생의 첫 기억들은 사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투성이다.


부모님 싸움으로 쑥대밭이 된 집.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빠를 잡으러 엄마 손을 잡고 온 동네를 뒤지는 모습.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집 나갔던 엄마가 한 달 만에 돌아오셔서 기쁨에 찬 내가 엄마를 안으려 했을 때, 나를 뿌리치신 것. 나에게 가장 상처인 기억. 



첫 기억들을 유추해 보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쯤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번 사이가 안 좋으셨던 건 아니다.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자식을 2명이나 더 낳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체로 나에게 부모님이란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서로를 싫어하는 존재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부모님 모두 각자의 사업을 하셨던지라 집에 계시지 않는 경우가 많으셨다.

동생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해주시는 도우미아주머니와 있는 집이 가장 평온했다. 



초등학생일 때의 기억

안 그래도 안 좋았던 부모님의 사이는 막내가 장애를 진단받고 나서부터 더 나빠졌다. 


또래보다 배우는 게 좀 느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초등학교 2학년이 돼서도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아들을 병원에 데려갔다가 뒤늦게 알게 된 거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하교하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 짧은 시간에 어찌 그리도 불안했는지. 거울을 보며 '에이 설마 장애인이겠어..?'라고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려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거운 침묵의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동생은 지적 장애 2급을 판정받았다.


그저 좀 느린 줄만 알았던 동생이 진짜 장애인이라니. 20여 년 전, 장애에 대해 무지하고 차별적이었던 사회에서 장애인 자식을 키워야 하는 부모님의 부담감과 두려움이 크셨던 걸까. 힘을 합쳐서 키워도 모자랄 판에 부모님은 더 자주, 격렬히 싸우시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는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집에 늦게 들어오셨고, 엄마는 나를 붙들고 그런 아버지를 욕하신다.



중학생일 때의 기억

숨 막히는 집의 기류를 피하는 요령은 바로 집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바로 갔다. 책도 읽고, 공부도 하다가 저녁 먹을 때면 집에 잠깐 들러 도우미아주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다시 도서관에 갔다. 10시나 11시쯤, 모두가 잠들 시간 즈음에 집에 돌아왔다. 


고작 중학생인 나에게 혼자 집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특히 주말과 방학이 제일 곤욕이었는데,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원하지도 않는 학원이나 24시간 독서실을 스스로 등록해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가려 했다.


한 번씩 학원이나 독서실에 가기 너어무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친한 친구집에 가서 하루 종일 놀곤 했는데, 등교하는 토요일에는 무조건 친구네로 갔던 것 같다. 그렇게 놀고도 여전히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 내가 최후의 도피처로 선택한 곳은 집 앞 공원이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내 분신 같은 mp3를 들으며 사색에 빠지곤 했다. 왜 우리 집은 이 모양인지, 왜 난 이렇게 불행한지, 인생은 원래 이런 건지... 드라마 주인공이 된 마냥 처량한 내 모습과 음악에 한껏 심취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깨워줬다. 



죽을 용기 없었던 그때

숨 막히는 집에 손이 많이 가는 막내 동생. 

것도 모자라 나는 중학교 진학 후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그 고충을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그들의 문제로, 또 막내의 장애로 이미 과부하 상태였고 동생들에겐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어야 했으니까.


사춘기라 그 모든 게 다 증폭되어 크게 느껴졌던 걸까.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내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로 도망갈 용기도 없었으니 스스로 죽을 용기 또한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죽여주길 바랐던 적이 있다. 그 마음으로 일부로 차가 쌩쌩 다니는 길에서 위험한 무단 횡단을 자주 했다. 한 번은 정말 크게 차 사고가 날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운전자가 나를 보며 죽고 싶냐며 쌍욕을 했다. 


맞아요. 죽고 싶은 데 죽을 용기는 없어서 그랬어요. 

성난 어른의 모습은 무서웠다. 그 뒤 무단횡단 전략은 멈췄다. 


옥상에 올라갔다. 정말 뛰어내릴 생각으로 올라갔는데, 막상 그 위에서 밑을 보니 소름이 끼쳐버렸다. 그렇게 한창을 옥상 난간에 서서 밑을 바라보는데,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바람의 손길이 왜인지 부드럽게 느껴졌다. 저 밑에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위에서 보니 사람은 참 작은 존재구나. 뭔지 모를 부질없음을 느끼면서도 저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저리 바삐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저들에게 인생은 정말 살만한 것인가?



살아보겠다는 의지

일단 죽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1) 실행할 용기도 없었으며, 

2) 다른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도서관에서 도피할 겸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선택지를 보류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도서관은 나에게 광산 같은 공간이 되었다. 내가 심리학을 처음 접한 건 그때부터였다. 


지금처럼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널리 알려지지도 않아 '심리학'이라는 단어 자체도 생소했던 시절. 지금은 그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내용은 어떤 곤경이든 이겨낼 방법은 있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책대로라면 나도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고작 중학생 때 죽을 이유가 없었다. 



심리학과 그것이 가르치는 행복할 수 있는 법에 대한 궁금증. 

일단 좀 더 살고 봐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이왕이면 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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