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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퍼즐도사 Feb 28. 2024

내 상처를 돌보려다 만나게 된 심리학 (2)

'심리학도의 내면 탐구 기록' 시작 (2)

죽고 싶은 데 죽을 용기는 없어서 일단 살고 있던 때, 한국엔 조기 유학 돌풍이 한창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선 유학 간다고 작별인사하는 친구들이 매 학기마다 있었다. 먼 친척 중에도 장남을 중국으로 유학 보낸 삼촌이 있다고 했다. 근데 막내딸도 유학 가고 싶어 한다며 이참에 아내도 같이 보내면 좋겠다 싶어 출국을 준비하고 있다는 삼촌의 소식을 엄마가 듣곤 물으셨다. 


'너도 이 참에 유학가지 않을래?'



맨 처음엔 미국도 아니고 중국이라길래 적잖이 실망했다. 물론 내가 한자를 좋아하긴 한다만,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졸랐던 미국 유학도 아니고 왠 뜬금없는 중국이라니. 하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집 밖에 있는 것이 그 시절 나에겐 무엇보다 더 중요했다. 어디든 무조건 떠나야 했다. 안 그럼 내가 곧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드디어 집을 떠났다

유학 준비를 2개월 정도하고 중3이 시작되는 해에 사촌 오빠가 있는 북경으로 사촌 언니, 외숙모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처음엔 언어도 모른 채 타지에 가서 적응한다고 정신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설렜다. 맨날 싸우는 부모님이 없는 내 인생은 어떨지. 재밌기도 했다. 유학과 동시에 K-장녀에서 막내로 전향한 것이 어색했지만 챙김을 받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된 경험이었다. 


근데 아프기도 했다. 모두가 잠자는 고요한 시간, 달빛이 가장 밝을 시간에 꼭 가족 생각이 났다. 왠지 내가 가족을 버리고 온 것 같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참아지지 않았다. 옆 침대에서 자고 있는 언니가 잠에서라도 깰까 봐 매번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소리 없이 흐느꼈던 많은 밤을 기억한다. 


소리 내지 않고 울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너무 북받쳐 오를 때면 조용히 집에서 나갔다. 그리론 놀이터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감정이 얼추 잠잠해질 때까지 원 없이 울다가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갔다.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나는 울었다. 


한국에 남겨진 가족을 생각하면 슬펐지만, 한국에 돌아갈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밤이면 찾아오는 슬픔에 잠겨있지 않는 동안만큼은 학교 생활도 즐겁고 공부도 재밌었기 때문이었을까. 유학 후, 매일 밤 가족을 생각하면서도 가족을 다시 원하진 않았다.



우여곡절

유학 생활에 적응한다고 한동안 심리학에 대한 생각이 잠시 많이 줄었었지만 그를 향한 궁금증은 없어진 적 없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2 시절에 심리학 전공을 하리라 결정했었다. 하지만 이를 아는 어른들은 나의 결정을 만류했다. 학교 선생님도, 입시 컨설턴트도 심리학은 나중에 취업하기 힘든 학문이라고, 지금도 심리학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 단순 호기심으로 무모하게 입시에 도전하냐며. 


부모님만 모르는 내 심리학 꿈, 주변에서 말린다고 한들 나는 내 결정대로 도전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유일한 대학에서는 유학생이 들어갈 수 있는 전공이 정해져 있었고, 심리학은 거기에 포함돼있지 않았다. 결국 제일 잘하던 것에 맞춰 소프트웨어학과로 진학하게 됐다. 이때 오히려 잘 됐다며 나중엔 IT 분야가 대박이 될 것이라고 회유하던 선생님들이 어찌 그리 야속해 보이던지. 아무도 내 마음 모르면서!


그래도 대학까지 들어간 만큼 내 전공에 정 붙이고 성실히 공부하려고 했다. 컴퓨터 다루는 것도 좋아하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흥미도 많았던 나이기도 하니까, 좀만 노력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2학기가 끝나갈 때 느꼈다. 나는 이 전공으로 3년을 더 버틸 자신이 없다는 것을. 못다 한 심리학의 꿈이 다시 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방학 동안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일단 휴학을 신청했다. 



돌고 돌아 심리학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고민할 것도 없이 일단 엄마한테 나의 꿈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이왕 공부하는 거 미국에서 해보고 싶다는 말도 하면서 엄마의 반응을 살폈다. 엄마는 흔쾌히 내 꿈을 지지해 주셨고,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라면서 내 두 번째 유학 준비를 도와주셨다. 


문제는 아빠였다. 굉장히 권위적인 성격에다 내 대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크셨던 분인지. 자퇴가 아닌 휴학을 먼저 신청해 둔 이유인 분이다. 하지만 아빠 모르게 휴학은 이미 진행 중이고, 미국 유학 준비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아빠한테 말 꺼내기가 무서워서 차일피일 미뤘다. 언젠간 말할 때가 오겠지 뭐-하면서.


더 이상 미루면 큰일 날 것 같아 미국으로 떠나기 2주 전 시점에 아빠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혹여라도 내 독단적 결정에 화라도 내실까 봐 장황한 말들로 아빠가 말할 틈도, 정신도 없도록 노력했다.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대학, 한 번에 간 딸이라고. 아빠 딸이라서 더 대단한 것도 할 수 있다는 말로 아빠를 띄워 준 것도 나름의 전략이었다. 몇 개월 간 혼자 걱정한 게 허무할 정도로 아빠는 호탕하게 나의 결정을 응원해 주셨고, 그렇게 나는 5년 간의 중국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심리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 심리학. 

그제야 들여다보고 어루만져질 수 있었던 나의 상처들.

눈 떠보니 심리학 석사 학위까지 따게 된 심리학도가 그동안 탐구하고 관찰했던 것들을 이 매거진에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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