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생퍼즐도사 May 27. 2022

오만하기 짝이 없었던 자식

세대적 트라우마 극복하기

우리 부모님은 현재 이혼 소송 중이시다.



부모님은 내가 유치원을 다니고 있을 때부터 일찍이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내가 유학을 결심할 무렵, 두 분의 사이는 더욱 안 좋아졌고, 내가 유학하는 십여 년 동안 두 분은 단절된 채로 사셨다. 한 집에 사시면서도 그렇게 사셨다. 어떨 땐 1층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시는데도 따로 타셨다. 유학하는 동안 방학 때마다 한국에 놀러 오면 항상 다짐했던 것이 ‘부모님 이혼시키기'였다.


두 분의 관계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2년 정도 됐을 때 최악에 치달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나와 동생이 나섰다. 동생과 힘을 합쳐 부모님을 앉혀 놓고 타협점을 찾으려고 한 달 동안 주말에 4시간씩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 시간과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우리 부모님은 agree to disagree, ‘서로 동의하지 않음에 동의'로 타협점 찾는 것을 거절하셨다. 처음으로 두 분 모두 이혼 소송을 결심하셨다.




그렇게 이혼 절차를 밟게 된 지 벌써 2년.



서로 원했던 이혼인지라 나는 부모님의 이혼 절차가 쉽고 빠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은 감정적으로 소송에 임하셨고 서로에게 상처주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며 서로를 힘들게 했다. 어떠한 말도 듣지 않는 두 분이 귀신에 씐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정이 지배하는 그들의 모든 행동과 말이 주변인까지 상처 주는 모습을 본인들은 보지 못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해도 안 되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적당히 타협하고 이제는 남은 여생 행복하게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소송을 결심하셨을 때 나는 절대로 부모님의 소송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당부드렸는데 이제 와서 돕지 않냐며 나를 원망하시는 걸까. 엄마한테는 아빠 편든다고 욕먹고, 아빠한테는 엄마 편든다는 욕만 먹었다. 가끔은 너무 서러워 새벽에 베란다에서 밤바람을 마시며 눈물을 훔쳐냈다.


더 이상 두 분만의 싸움이 아닌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큰 자식인 내가 나서야 했다.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행동들의 수단이 애석하게도 장애를 가진 막내 동생이었다. 일화로는 소송 중에 발생한 금전적 문제를 아빠 회사에 다니는 막내 동생이 강압적으로 부담했던 적이 있다. 아빠가 문제가 된 금액을 동생 월급에서 일방적으로 빼버린 것이다. 그걸 안 엄마는 당연히 그냥 지나칠 일 없었고, 동생을 대동해 노동청에 가서 ‘장애인 임금체불’ 명목으로 회사 대표인 우리 아빠를 고소하게 했다. 그리고 그에 맞서, 아빠가 동생에게 친필로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는 거짓 진정서를 써서 냈다고 한다. 우리 사건을 담당하던 노동청 직원도 혼란스러웠던지 마지못해 큰 딸인 나에게 전화를 했다. 업무 중에 노동청 직원으로부터 전해 들은 상황은 내가 봐도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없기도 했지만 분하고, 부모님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부모님은 장애를 가진 막내를 방패와 칼 삼아 그들만의 부질없는 감정싸움을 계속했다. 막내가 부모님 이혼 소송에서 힘없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며 괴로워하는 나와 둘째에게 부모님은 오히려 자기가 더 유리할 수 있도록 법정에 서서 증언을 해달라는 말도 했다. 오로지 자기가 이기겠다고 자식들이 상처받을 것은 한치도 생각 안 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부모님의 얼굴을 차마 볼 수도 없을 만큼 나는 부모님을 원망했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그토록 미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내 부모님을 그렇게나 미워할 수가. 그리고 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매일같이 커져서 어느샌가 사람을 미워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매사에 부정적인 시선과 날카로운 말들. 내가 정말 싫어하고 혹시나 나에게 스며들까 경계하는 것들인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 어린 말로 나의 상태를 살펴주니 그제야 그 모습을 보게 됐다. 그 모습 또한 충격인데, 무엇보다 그 미워하는 마음이 자꾸 내 일상을 휘두르고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것이 제일 속상했다. 부모님의 싸움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만뿐인 인생은 원치 않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마음을 풀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4년 만에 다시 심리상담을 찾았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부모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자식의 눈으로만 부모님을 봤지, 한 번도 사람 대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사실이 나로선 흥미로웠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던가. 심리학 석사가 있다고 한들 내 가족에 대해선 감정적으로 생각하고 학교에서 배웠던 여러 방식대로 부모님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지 못했었다. 여전히 소화하기 힘든 행동들이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원망만 했던 부모님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첫째는 절대 못 되는 둘째

우리 부모님은 모두 둘째로 태어나셨지만 첫째 마냥 어려서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셨다. 그 막중한 책임감과 끈기로 가난했던 각자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셨다. 하지만 옛날 분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들은 큰 아들이 최고-라는 생각이 크셨다. 손녀인 내가 봐도 고생은 우리 엄마, 아빠가 다 했는데 무능하고 사고만 치는 큰 아들만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돈이 필요하면 그제야 우리 부모님을 찾는 모습이 나도 싫은데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싫을까?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결을 해줬어야만 했던 그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받는 게 당연한 부모와 형제 사이에서 참 외로우셨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채워지지 않은 인정에 대한 욕구가 어마어마했겠다.


불행하게도 인정 욕구가 극심한 사람들끼리 만나 결혼했으니 서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본인들도 스스로 다스릴 줄 모르는 그 욕구를 채워달라며 서로를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 두 분이 왜 그렇게까지 싸우며 자식들에게까지 날을 세우셨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물론 부모님의 행동과 말 모두 정당화할 수 없지만, 부모님에게 더 이상 원망이 아닌 측은지심을 느꼈다. 참 서글픈 인생을 사셨겠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자식들을 키우셨겠구나.


생존만이 전부였던 시대

인정 욕구를 스스로 다스릴 줄 알면 해결될 관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왜 그 사실을 모를까?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라면 꼭 알아야 할 내 모습 중의 하나인데. 이 질문에 대한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부모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의 문화까지 생각하게 됐다. 우리 조부모님 세대는 6.25 전쟁을 경험하셨다. 전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착같이 살아남기일 것이다.

오늘 어떡해서든 살아남아야 내일이 있던 시기이다. 매슬로우 욕구 이론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생존 욕구만 충족해도 승자가 되는, 난이도 최상의 서바이벌 모드였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인정이나 소속감, 자아실현 등과 같은 고차원 욕구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사치인 게 당연하다.




매슬로우의 이론대로라면 기본 욕구가 한 단계씩 채워질수록 우리는 고차원 욕구까지 생기게 된다.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욕구를 스스로 인지하고 해결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생존 욕구 이상의 욕구에 대해 경험해보지도 못했거나 그게 왜 중요한지 모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어르신들은 자식들도 그들의 경험과 관점대로 키웠을 것이다. 그러니 그 자식들이 세상이 좋아져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배운다고 한들, 부모로부터 좀 더 고차원 단계인 인정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컸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필요성조차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야 할 경험이 있으면 트라우마인데, 있어야 할 것이 없어도 트라우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정 욕구에 대해 배우지 못한 우리 부모님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세대적 트라우마를 알게 되니 그동안 나만의 기준으로 부모님을 답답해하고 원망했던 내 모습이 오만하고 이기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동안 이혼 소송 중에 부모님이 만든 여러 사건들에 대해 자식인 내가 부모님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한다는 점에 가장 분노했었다. 하지만 내가 더 잘 배우고 잘나서가 아닌데, 나는 내 부모님을 바보 취급했다. 아니 가르치려 했다. 내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은 다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들이 고군분투하며 지켜온 것들로부터 온 것인데 마치 내가 다 이룬 것 마냥 오만한 태도로 나만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했다. 그들은 알고 보면 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을 텐데, 그걸로는 부족하다면서 제일 많이 누린 내가 떼를 쓴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타박이 아니라 친절한 제안을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누린 내가 마땅히 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이혼 소송은 정말 힘든 과정이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부모님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요즘은 그동안 오만했던 태도는 버리고 조금 더 부모님께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부모님이 좀 더 여유가 생길 때 더 좋은 길이 있다고 남은 여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그들의 인정 욕구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이해와 배려를 통해 서로 눈을 맞춰 조금 더 편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친다.


아직은 좀 힘들겠지만 언젠가 편안해질 모녀, 부녀 관계를 바라며.






이 글을 쓰며 들었던 노래: https://soundcloud.app.goo.gl/dVQGHoC6Q3R5dquo8

작가의 이전글 그래요, 저 금수저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