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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연희 Apr 05. 2024

프롤로그. 10년을 만났는데, 5년을 더 연애하잔다

10년 만의 화이트크리스마스가 예고되었던 크리스마스이브날 오후였다.
얇은 자취방 커튼을 뚫고 오후 햇살이 방 안을 비추었고, 이불속의 우리는 머리에 저마다 까치집을 지은 채 눈도 다 못 떠 서로의 조각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제 각기 편한 자세로 숙면을 취했지만 어렴풋이 깨면서는 서로의 품을 파고들었다. 만족스러운 늦잠이었다.


“우리 오늘 저녁 몇 시 예약이랬지?”


“7시”


“지금 3시니깐, 준비해서 나가서 좀 걷다가, 카페 갔다가 밥 먹자 어때”


“너무 좋아”


완벽하게 루즈한 계획까지 합의 보고 일어서려는 나를 그가 이불속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조금 더 그렇게 끌어안고 서로의 체취에 안정감을 느끼다가, 외출 준비를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연남동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린 10년이나 되는 장수 커플이고, 아직 젊고, 아직 열렬히 사랑하는 커플인 게 내심 더 특별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가게마다 사람들이 꽉 차서 쉽게 카페에 자리 잡지 못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었다.몇번을 만석인 카페를 뒤로하고 나오면서도 즐거웠다.


엘리베이터 없는 3층 계단을 올라가는 카페에 겨우 한 자리 차지했다.
한쪽 벽면에 기다란 큰 창이 있던 카페는 커다랗고 앙상한 나무가 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였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고, 너와 함께 있어서 나에겐 그 장면도 낭만이었다.


이 카페의 커피 맛이 좋은지 궁금해서 인스타로 검색해 보니, 여기, 가을엔 저 앙상한 나무가 은행잎으로 가득 차서 황금색 배경이 창을 가득 메우는 은행나무 명소였다.
 
“여기 가을에 이렇게 예쁜 곳인가 봐, 자리 잡기 힘든 곳 이래.”
지금은 은행잎이 없는 마른 나뭇가지지만, 내년 가을에 잎이 가득할 은행나무를 상상했다.


우리도 가을쯤 결혼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봄은 꽃가루가 간지럽고, 여름은 네가 취약하고, 겨울은 내가 추위를 못견디니까, 가을이 좋겠다.
 
“자기는 심으로 언제쯤 결혼하고 싶어?”


“난 늘 말하잖아, 35살쯤에”


35살이면, 5년 후인데.

10년이 다되어가는 연애를, 5년을 더 하잔다.


“그럼 자기는 애기는 안 가질 생각이야?”


“애기도 낳아야지.”


“근데 35살에 결혼하면, 우리 너무 늦는데. 신혼도 못 즐기고.”


“우리 사촌형네도 형수님 40살에 아이 낳았어. 요즘 의술이 좋아서 다 돼.”


“다행히 아이를 갖고 출산도 하셨지만, 어렵게 가진걸 수도 있잖아.”


“그럼 뭐 어떻게 해. 애 낳자고 지금 결혼할 순 없잖아.”


“어차피 할 결혼이면 빨리하고, 신혼도 즐기다 애기 갖고 싶어. 결혼과 동시에 출산의 부담감 느끼고 싶지 않아.”


“아무도 너한테 출산의 부담감 안 줬는데 왜 그래”
“당연한 수순이니까, 아무도 부담 안 줘도, 우리가 조급해질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몸을 건강하게 관리할 생각을 안 하고 왜 아이 갖기 어려울 생각을 지금 하냐구.”


“내 자궁이나 니 정자나, 건강관리 같은 의지로 되는 영역이 아니니까 그러지.”


아.
너무 멋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10번의 크리스마스를 떨어져 있던 날마저도 함께이고픈 마음은 변함없는 그런 특별한 연애를 한 우리였는데.


자궁이니 정자니 하며 노산을 걱정하고 있자니,
눈 내리기 직전의 낮고 묵직해진 회색공기는 더 이상 이벤트 직전의 고요함이 아니라
도심의 차갑고 칙칙한 우울함이 되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나는 미래의 우리를 위해 어렵더라도 지금은 결혼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닥칠 미래의 일을 그가  무책임하게 회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현재 우리는 결혼할 수 없는 상황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생각했고,
미래를 위해 지금 불가능한 결혼을 하자는 건 뜬구름 잡는 소리라 생각했다.


서로가, 자신의 관점이 더 현실적이고, 상대를 철없는 사람이라 여기며 입을 닫았다.


“이제 시간 다 됐으니까 밥 먹으러 가자.”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장실에 들어와서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크리스마스 코스요리 예약도 했는데,

오늘 안에 답이 내려지지 않을 이 논쟁으로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망칠 순 없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니 나를 기다리는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함께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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