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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현 Nov 06. 2023

직접 쓰는 성장 일기

스물 위 서른 아래, 간헐적 성장과 삶

[꼬마 통역사, 문장의 힘을 믿다]

 “아현아, 이거 뭐라고 적혀있는지 봐줄래?”

 한글을 뗄 무렵부터, 막내인 나에게도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하나 주어졌다. 그건 바로, 아버지께 무언가를 대신 읽어드리는 일이었다. 숫자 몇 개 적힌 메모지조차, 경증 시각장애가 있으신 아버지께는 힘겨운 눈싸움 상대였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보이는 모든 글자를 그대로 있는 힘껏 읽어내곤 했다. 하지만 종종 제품 설명서, 신문 기사와 같은 긴 글을 전달할 때 발생하는 소통의 오류는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고심 끝에 찾은 자구책은, 한발 먼저 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요점을 글이 아닌 소통의 문법으로 의역하고, 때론 비유와 과장의 힘을 빌려 전달하기도 했다. 한결 원활해진 소통을 체감한 그때부터, 아이에게 쌈 싸주듯 수신자가 잘 ‘받을’ 메시지를 기획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버지와 나눈 단어의 수만큼, 생동하는 소통과 역동하는 표현을 중요시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다]

 통(通)함이 주는 쾌감을 알게 된 뒤, 더 넓은 창구 역할을 꿈꾸며 경기도 대학생기자단 활동을 시작했다. 내 고객은 1명이었는데, 이제는 1천만 명의 도민을 위한 소통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참 설렜다. 그렇게 다양한 형식의 기사를 발행하며 ‘내 콘텐츠는 늘 재밌지!’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기자단 대표로 <제주4.3 바로알기 행사>에 참여하며 때론 유쾌하게 풀 수 없는 주제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사건을 더 공부하기 위해 찾아간 제주도 4.3 평화기념관에서, 도민들에게 먼저 다가간 덕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비관광객인 내게, 도민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제주도는 마냥 예쁘고 행복한 관광지는 아닙니다. 우리에겐 동시대인의 죽음과 연결된 아픈 터전이에요.”

 그때 알게 됐다. 우리가 명랑하게 누빌 수 있는 이 마당은 우리의 역사가 다져줬다는 사실을. 그리고 모두가 이를 한 번쯤은 떠올려주길 바라는 도민들의 염원도. 그래서 더 어렵고 유쾌하지 않을 이 사건이 잘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에, 여행자의 시점을 담은 카드뉴스를 기획했다. 제주도를 그저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는 <다크 투어리즘> 형식으로 스토리를 구성했다. 여행 명소를 먼저 조명한 후, 같은 장소의 70년 전으로 시점을 연결하였고 관광 동선에 따라 사건의 현장을 소개했다. 현장의 무대로 기꺼이 독자를 초대하는 관점에서 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디자인에 힘쓸 수 있었고, 이러한 활동 덕에 당월 최우수 기사로 선정될 수 있었다. 캐주얼 콘텐츠를 통해서도 독자와의 감정적인 연결을 형성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유니버설 콘텐츠’ 에디터를 꿈꾸다]

 뭐든 눈앞에 있고 땅 위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멎지 않은 역사의 파편이, 누군가에게는 두 줄 적힌 메모지가 그랬다. 그렇게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전하는 법을 배웠다. 소통에는 정답도 끝도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선명하게 닦아가는 과정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무한함을 향해 가며, 세상에 있는 ‘안 보임’의 것들을 ‘잘 보임’으로 바꿔나가고픈 꿈이 생겼다. 이제는 브랜드와 소비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역하는 에디터로서, 기꺼이 모두의 가시거리를 넓혀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갈 것이다. 지금도 계속 어디선가 그런 콘텐츠를 만들고 있을 것 같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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