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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Sep 08. 2022

이혼 후, 명절 단상.

작년 6월 15일 나는 이혼했다. 이혼 이후 맞는 세 번째 명절, 이번 추석. 올 추석에는 큰 일이 두 가지 있다. 우선 명절이 끝나고 딸의 수술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마감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둘 다 긴박한 일이라 조금 예민해진 나를 느낀다. 게다가 어제 집안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명절 제사를 안 지내게 되었다. 명절 전에 집안 큰어른이 돌아가시면 그해 차례는 지내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나 보다. 그리고 내년부터 우리집도 제사를 아예 거두기로 했으므로 일을 크게 덜었다. 아이는 추석 당일에 전 남편이 데려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온전히 연휴 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이후 아이 수술 때문에 긴장하고는 있지만.


이혼 전의 내 명절 풍경은 다른 여느 집들과 마찬가지였다. 항상 친정에 먼저 와서 자긴 했으나 바로 다음 날 시가로 간다. 가서 혼자 제수 음식을 준비한다. 어머님이 마련해 두신 식재료로 지지고 볶고 끓인다. 아버님은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러 가고, 남편은 친구를 만나러 가고, 어머님은 장사를 하러 나가셨었다. 그래서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음식을 했다. 음식이라고 해봤자 전 부치기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 많은 전을 혼자서 다 부치려니 힘이 들긴 매한가지였다. 그러고 해가 지면 저녁상을 차린다. 어머님이 해놓으신 반찬을 꺼내 차리기만 하면 되지만 설거지는 다 내 몫. 그리고 아가씨네 식구들까지 옆에 살아서 같이 놀러와 밥을 먹으면 설거지는 더 늘어나기만 한다. 나는 친구와 놀고 온 남편을 째려보고 잠에 든다. 가끔 싸우기도 했다. 기름 범벅인 내 손을 보고 남편은 미안해하면서도 곧 어머님이 깔아준 이불 위에서 코를 드르렁 골면서 자버린다. 나는 추석 당일에 새벽 6시에 일어나 밥을 해야 했다. 항상 깨끗하게 단장을 하고 있으라는 어머님 말씀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곧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그러고 나와서 밥을 한다.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이고, 어머님을 도와 이것저것 하다보면 벌써 아침 시간이 된다. 그냥 제사를 지내고 아침을 먹으면 될 것을 꼭 아침을 따로 챙기고 제삿밥은 따로 또 먹는다. 설거지옥. 설거지옥이었다.


제사가 끝나고 상을 다 치우면 나름 휴게 시간이다. 식구들이 빙 둘러 앉아서 티비를 본다. 그때부터 아버님의 설교가 시작된다. 반쯤은 남편이랑 하는 대화에 불과했지만 이야기 도중에 내 얼굴을 보면서 '새아가, 그렇지 않니?' 하는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정치 성향을 가진 아버님 어머님이 구시렁구시렁 뭔가를 씨부릴 때는 속으로 반박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집에서 무색무미무취여야만 했다. 생각할 사고를 지니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며느리로만 기능하면 되는 그런 존재. 언젠가 한번 내가 불교대학을 졸업한 게 너무 기뻐서 자랑했다가 너무 반응이 없어서 무안했던 적이 있다. 정말, "아, 그래?" 하고 끝났다. 나름 연등도 띄우고 꼬박꼬박 절에 기도도 가는 집안이라 불교대학 졸업했다고 그러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아가씨의 승진 소식에는 집안이 한참을 들썩였다. 계속해서 아가씨의 실력이 어떻고 보직이 어떻고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때 느꼈다. 아, 나는 이 집안에서 뭔가의 색채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존재구나, 하는 느낌. 굳이 뭔갈 하지 않아도, 그저 며느리의 위치에 앉아서 묵묵히 일만 하기만 해도 되는 존재. 나의 특별함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내가 아마 책을 냈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혼 후의 명절은 낯설었다. 아이는 전 남편의 집에 가 있고, 집안은 썰렁하다. 오랜만에 지내는 엄마 아빠와의 명절 제사는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삼촌도 동생도 없는 집에서 늙은 노인 둘이서 지내는 제사에 낀 나는 엄마를 도와 묵묵히 일을 했다. 아빠는 지방을 쓰고, 제사를 주도하고, 또 우리는 아침밥으로 제삿밥을 느긋하게 먹고, 우리가 좋아하는 커피와 빵을 먹었다. 시가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가에서의 간식 타임이란 남은 과일을 대충 먹으며 커다랗게 틀어진 티비나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집만의 이런 분위기가 그리웠다. 우리집은 아빠, 엄마, 나, 동생 모두 정치적 성향이 같다. 그래서 만나면 개거품을 물고 함께 욕하는 분위기(웃음)가 어느 정도 있다. 아빠가 불평 불만하는 소리를 들으며, 드립 커피를 내려오신 엄마에게서 커피를 받아 들고, 방금 사온 갓 만든 빵을 엄마 아빠와 나눠 먹었다. 나는 엄마와 이런저런 아이 이야기를 조금 하고, 제사 음식을 어떤 걸 가져갈 건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엄마는 너희 집에 가서 좀 쉬어라, 한다. 나는 튀김 같은 걸 조금 싸서 우리집으로 온다. 그러곤 하루종일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다가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엄마, 나 OO 만나고 있어"라고 굳이 자랑을 했다. 엄마는 "아유, 잘됐네, 그동안 시가 가느라 친구들도 못 봤을 텐데 실컷 놀고 와라"라고 했다. ㅋㅋ하는 웃음이 뒤에 붙어 있었다. 이런 명절은 처음이었다.


이번 명절은 더 특이할 예정이다. 아이는 전 남편에게 가 있고, 나는 연휴 내내 일을 해야 한다. 심지어 제사도 없어서 나는 내 집에서 계속 안 나가고 일만 할 것 같다. 며느리로만 기능했던 이 전의 명절 동안 나는 연휴 내내 긴장 상태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압박, '며느리'라는 자리를 제대로 메꿔주어야 한다는 압박. 집안에서 무색무미무취로 가만히 호호 웃으며 앉아서 그 자리만 지키면 된다는 '허탈감' 등. 내가 나로서 존재할 필요없다는 타의적 강압. 내가 나로서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건 끝간데 없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강압이다. 내 색채를 드러내고, 내가 누군지 강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어느 지점까지 도달하면 허탈함에 이른다. 그래서 많은 한국의 며느리들이 명절 연휴에 좌절하는 것이다. 친구를 제대로 만나러 갈 수도, 친정에 제대로 갈 수도 없으면서, 시가에 틀어박혀서 며느리로만 기능해야 한다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돌덩이 같은 짐이었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제야 나는 연휴 때 나로서 기능한다. 나는 내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있고, 내가 내 시간을 써서 아이와 놀러를 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일을 할 수 있기도 한다. 일을 할 수도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어디 감히 며느리가 추석 제사를 안 지내고 자기 일을 한다고 설치는가, 라고.


아직도 많은 며느리들이 가부장제 아래, 이혼 전의 나처럼 신음하고 있다. 다 같은 말을 한다. 내가 나일 필요가 없었다고. 내가 나로서 기능할 필요가 없는 자리라고, 며느리는. 나는 어떻게 보면 가부장제에서 뛰쳐나온 격이고, 더 이상 그 의무를 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도 그렇기도 하다. 답은 없다. 하지만 며느리는 며느리로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고, 며느리도 생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소리쳐 주고 싶다. 모든 집안이 그런 건 아니겠으나 묘하게 며느리 자리는 그렇다. 집안을 뛰쳐나온 며느리가 감히 말하길, 며느리가 아닌 자신으로서 살라고, 나로서 기능하라고, 내 색채를 마음껏 드러내라고 소리치고 싶다. "아버님, 저는 친구가 만나자고 해서 약속 좀 나가 볼게요." "어머님, 아침밥은 제삿밥으로 좀 먹으면 안 되나요." "어머님, 올해는 우리 가족들끼리 여행 좀 가볼게요."라는 말들이 넘실대는 한국이었으면 좋겠다. 저렇게까진 아니어도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하는 '며느리'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주제 넘게 이혼한 '전' 며느리가 몇 자 구시렁거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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