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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Sep 30. 2022

할머니, 나의 할머니

지지난 주에 할머니 산소에 다녀왔다. 묘를 쓰다듬으면서 ‘난 잘 지내요, 할머니’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뒤 수풀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담배를 피웠다. 산의 숲길로 난 길목을 바라봤다. 그곳은 내가 어릴 적 항상 뛰어다니던 곳. 어릴 적 나는 자주 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어린 동생을 보느라, 직장을 다니느라 바쁜 엄마 아빠를 대신해 나를 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논일을 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논길을 뛰어다니던 내가, 수풀을 헤치며 소리 지르던 내가. 동네 어귀에서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던 내가, 크게 코끼리 아저씨를 부르던 내가.     


할머니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항상 찬장에 소주병을 숨겨두고 몰래 한 잔씩 마셨다. 나는 어린 시절 자주 그런 장면을 보았다. 할머니의 얼굴은 항상 붉었고, 항상 욕설을 달고 사셨다. 내 등짝을 후려치듯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바닥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했다. 할머니의 치아는 다 썩어서 마치 까맣고 노란 알갱이들이 가득한 옥수수 같았다. ‘이가 없어서 밥을 씹기가 힘들다’는 그녀의 말은 진짜였다. 그녀는 갑자기 비명사했다. 어떻게 돌아가신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의 말로는 수돗가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계실 때의 풍경은 매번 똑같았다. 집에 제사라도 있으면 오만 남자 친척들이 다글다글하게 모여서 술을 먹고, 그 잔치 자리를 도맡아 선두 지휘했던 우리 할머니. 그 밑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몇십 년을 도와 일만 해야 했던 우리 엄마. 남자 친척 어르신들이 방에서 담배를 피우며 술을 먹는 모습을 할머니는 멀찍이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서 술을 먹으며 바라보았다. 뭐가 모자라다 싶으면 얼른 썰어다 가져다주었다. 어렸던 나는 주방을 가로지르며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그 어른들의 술 먹는 방을 흘금흘금 쳐다보았다. 분명 기이한 장면이었지만 할머니가 지배했던 주방의 여자들은 찍소리를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가족은 재편되었다. 엄마 아빠는 혼자 계신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집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그 집에서 딱 4년을 살다가 돌아가셨다. 일 년에 몇 번씩이나 있던 제사는 줄어들었고, 점차 집안에서의 엄마 입김이 세졌다. 이제 친척 어르신들도 큰며느리인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사이 몇 번의 이사 끝에 엄마 아빠는 지금 사는 도시의 시내 한복판 집을 구했다. 제사도 없앴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이혼을 했다. 그리고 엄마 아빠 곁으로 왔다.     


엄마는 가끔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나타나 말을 걸어오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엄마와 아빠 나는 복숭아를 사서 할머니집에 들렀다. 할머니는 강낭콩을 까고 계셨다. 하늘은 검었다. 여름의 한복판, 태풍이 금방이라도 불어닥칠 것 같은 폭풍전야 같은 날씨였다. 우리는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고 일주일 뒤, 갑자기 할머니가 급사했다. 나는 도서관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집으로 갔다. 엄마의 검은 드레스를 빌려 입고 아빠 차에 타고 빈소로 갔다. 나는 빈소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뛰쳐 나와서 몰래 한구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믿기지 않았다.     


삼우제 날, 할머니 집으로 갔다. 주방에는 일주일 전 우리가 방문했을 때 사온 복숭아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 복숭아들을 하나둘 주워 담으며 울었다. 집을 한바퀴 돌고, 안방에 제사상을 차렸다. 우리 가족 세 명은 거기서 꾸깃꾸깃 몸을 접어 잠을 청했다. 왜 세 명이냐 하면 남동생은 당시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똑같이 무섬증을 느꼈다. 새벽에 깼을 때 바라본 할머니의 영정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마치 사진 속에서 얼굴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내 등짝을 팍! 하고 후려칠 것 같이 생생한 그 얼굴.     


아빠는 할머니의 장례가 다 끝나고 나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야가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아빠가 많이 의지가 되더구나.”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묵묵히 엄마 아빠 뒤를 따르고, 슬프게 운 것밖에는. 스물다섯의 나는 처음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도했다.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때의 심경은 이랬다. 아, 어찌 사람이 죽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생이 끝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언제까지나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 독불장군처럼 군림하던 시어머니이자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였던 그 여자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잇따라 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스물다섯 여름에 경험한 할머니의 죽음의 느낌만큼 기이한 것은 없었다. 뭔가 내 젊은 시절의 열기가 한풀 꺾이는 듯했고, 내 청춘의 한 고비를 넘긴 것 같기도 했으며, 이제는 뭔가 변해야 할 때라는 걸 고하는 경고장 같기도 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그랬다. 나는 이제 마냥 어린 이십 대가 아니었다. 뭔가 재촉당하고 있었고 무엇인가에 쫓기게 되었다. 그걸 나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전까지는 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관심도 없었고 어떻게 아는지도 몰랐다면, 할머니의 죽음으로 시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무서운 깨달음, 인생은 언제고 시작되었다면 끝이 난다는 깨달음. 그 단순한 이치를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는 것도, 증손주를 낳는 것도, 이혼하는 것도 못 보셨다. 그걸 다 지켜보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들을 종종 한다.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내가 ‘할머니, 엄마 메뚜기도 아기 메뚜기를 업고 있어, 나도 업어줘’라고 할머니에게 했다고 엄마가 종종 말해 주셨다. 그 아무것도 없는 시골 어귀에 있던 작은 점빵이 기억난다. 나무 판대기 위에 있던 상온의 두유 같은 것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과자 같은 것들, 사탕 같은 것들. 할머니는 꼭 그런 것들을 사와서 찬장에 보관하고 있다가 내가 가면 짠 하고 꺼내 주셨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몰래 몰래 꺼내서 한 입 먹어 보라고. 나는 비밀스러운 그녀의 몸짓을 기억한다.    

 

내가 배가 고플 때면 ‘짬빠게스 끓여 주까’ 하고 물으시던 할머니. 짬빠게스는 짜파게티를 말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항상 내가 ‘할머니, 짜! 파게티예요!’ 하고 정정해 줘도 짬빠게스라고 발음하곤 했다. 짜파게티를 나는 지금도 좋아한다. 내 딸도 즐겨 먹는 짜파게티를 끓일 때면 가끔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항상 면이 불어 터지게 끓여 주셨던 할머니는 나랑 내 동생이 먹는 모습만 꿈뻑꿈뻑 보시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수의를 스스로 지었던 할머니. 옷장 맨 밑바닥에서 할머니가 직접 베틀로 짠 우리 아빠의 수의와 당신의 수의가 발견되었다. 할머니는 그걸 입고 떠나갔다. 나는 염을 할 때 할머니의 발을 슬쩍 만져보았다. 뾰족한 수의 신발 안으로 만져진 발은 아주 차갑고 딱딱했다. 죽음은 차갑고 딱딱하다. 없는 것이다. 캄캄한 것이다. 슬프지만 잊혀지는 것이다.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이다. 오늘처럼 할머니가 생각나는 날이면 그렇다.    

 

이젠 내 자식을 등에 업고 사는 나는, 죽음이란 단어와는 멀어 보인다.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기 바쁘다. 이제 모든 것이 처음인 내 자식은, 내 딸은 생의 싱그러움으로 매일 새롭게 자라나고 있다.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듯한 존재. 나는 이 존재를 키워 내야만 한다. 그리고 내 딸 역시, 타인의 죽음을 겪을 것이고, 시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나는 죽을 것이다. 할머니처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사실 죽음은 언제고 생각해도 좋다. 죽음은 삶을 새롭게 한다. 삶을 새롭게 빨고 말린다. 할머니의 죽음은 내 젊은 시절을 순식간에 낡게 만들고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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