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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Oct 06. 2022

내가 이혼한 이유.

오늘 뭔갈 하다가 문득 혼인 신고서가 생각이 났다. 그 종잇조각에 각자의 이름을 써넣고 증인들의 사인을 받아오던 일들이. 그걸 제출해놓고 좋아하던 전 남편의 문자 메시지가. 11월 28일이었다. 2012년. 2012년이라니 얼마나 까마득한 날짜인가. 10년 전이다.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전 남편과 즐거운 연애를 하고 있었다. 매일마다 찾아오는 전 남편. 매일마다 이어지는 데이트. 하루하루가 즐겁고 편안한 날들. 우리는 한 치의 엇갈림도 없이 결혼 준비를 했다. 양가 부모님을 만나고, 식사를 하고, 또 데이트, 데이트. 거의 반 동거를 하다시피 살았다. 우리는 행복했다.


혼인 신고서라, 얼마나 터무니 없는 짓이었나. 얼마나 허무맹랑한 짓이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떻게 한 사람과 살 결정을, 만난 지 5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내릴 수가 있었느냔 말이다. 나는 전 남편을 만나고 한 달만에 프러포즈를 받았다. 양가 인사도 3개월 안에 다 드리고 끝났다. 스물여덟의 나는 패기가 넘쳤다. 에너지가 어디서 솟아났을까, 나는 지치지도 않고 그 대장정을 기어코 마무리했다. 2013년 2월 23일,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우리는 발리로 신혼여행을 갔고 홍콩을 거쳐서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는 흔하디흔한 신혼부부였다. 그냥 마냥 저냥 행복해 보이는, 저들 행복에 빠져 담뿍 사랑하는 커플.


그 서류 한 장으로 맺어진 계약은 2021년 6월 10일에 끝났다. 각자 법원에서 돌아서며 오던 길을 나는 잊지 못한다. 거의 9년에 육박하는 결혼 생활. 우리는 재빠르게 식고 순식간에 불행해져 갔다. 생기지 않는 아이, 성격차이, 생활 습관 차이로 인한 불화로 계속해서 싸워 댔다. 욕설과 비방이 오갔다. 육탄전은 없었다. 다만 서로를 향한 맹렬한 무시와 비난, 경멸이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각자의 삶을 살았다. 서로 애정 섞인 몸짓이나 그런 것도 거의 결혼 직후부터 없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굽어보면 막막하다. 답이 안 나온다. 우리는 반목했다. 양가 가풍도 철저하게 달랐다.


가풍 하니까 말이 나온 것인데, 나는 그쪽 집안에 도저히 영속될 수 없는 존재였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건 그렇다치고, 사고하는 프로세스 자체가 다른 그 집안의 분위기란. 나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았다, 항상. 마치 물에서 떠내려오다 건져진 아이처럼 나는 새아가로 불렸다. 나는 다시 돌아간대도 시가 생활만은 하고 싶지 않다. 그쪽 가족은 그쪽 가족대로 살았으면 한다. 명절에 불려가서 음식을 하고, 원치도 않는 티비 채널이나 보고 있고, 먹고 싶지도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괴로움.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들 뿐.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부터 더 심해졌다.


아이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가졌다. 그것도 인공 수정으로. 그것도 두 번의 실패를 겪고 나서. 시험관을 앞두고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시도해 본 게 성공으로 이어졌다. 나는 아이를 가지고 나서 기쁨도 느꼈지만 시가 사람들에 대한 분노도 느꼈다. 자, 이제 가졌으니 됐냐? 하는 마음도 들었다. 시아버지는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되었을 때 여자를 발정 나게 한다는 노루즙인가 뭔가를 선물로 줬다. 나는 기분이 나빠 모조리 다 내버렸다. 그리고 그 시아버지는, 시할머님 제사 때 기어코 울면서 무릎을 꿇고 제단 앞에서 빌었다. "어머님,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아이를 안 주십니까." 대충 그런 말인 것 같았다. 시고모란 사람도 내 옆에서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하는 표정으로 그 모습들을 황망하게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공 수정 전에 시고모가 몇 차례나 전화가 와서 "시험관을 바로 해보면 어떠니 질부~" 하는 것을 들었던 나는, 내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아이를 못 갖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그 사이에 전 남편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인공 수정을 두 번이나 실패하면서 살이 찌고 몸은 망가졌다. 나는 조울증이 더 극심해졌고 병원에도 가지 않고 있었다. 집안일은 내팽개쳤고, 같이 사는 사람을 배려해 줄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그때 내가 조울증이 그렇게 심한지도 몰랐다. 매일매일이 전쟁같은 삶이었다. 만약 2019년에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해에 조용히 협의 이혼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이는 들어섰고, 모든 집안 사람들은 행복감에 빠졌다. 2021년에 이혼할 거라는 사실은 다들 꿈에도 모른 채. 그렇게 우리는 서로 쩍 갈라진 바위처럼 서로를 등지고 서서 중간에 낀 아이를 같이 양육하다가 헤어졌다. 아이를 낳고 1년 몇 개월만에 갈라섰으니, 말 다 했지. 아이가 없었던 7년 간의 세월이 너무 길었나 보다. 그 반목했던 시간들의 무게가 너무 컸나 보다. 우리는 서로 말도 통하지 않았고 서로 벽에다 소리를 질러 댔다. 매일 싸웠고 매일 울었다. 나는 술 없이는 육아를 못할 정도였다. 오전 10시부터 술을 마셨고, 아이를 재우고는 베란다에서 줄담배를 피웠다. 그 쓰레기 같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말이다.


웃기지만 요약해 보자면 아이가 오랫동안 생기지 않았던 기간, 그리고 내 병증, 그리고 서로의 성격 차이, 생활 습관 차이 때문에 이혼한 게 되는데, 이걸 한 번에 쓰려니 머리가 복잡하다. 결정적으로 내가 이혼한 이유는 한 사람에게 내가 영속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결혼이 굉장히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 비논리적인 것을 사람들은 하고 산다. 어떤 이들은 훌륭하게 해낸다.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나 같이 한 사람과 영원히 살 수 없는 인간들도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낳은 것에는 후회없지만 결혼한 것은 정말 후회한다.


후회해 봤자 되돌아오는 건 회환뿐. 결혼이 비논리적이라느니 해봤자 나도 유경험자다. 제 얼굴에 똥칠하는 격이다. 어찌됐든 나는 이혼에 성공했고 이제는 혼자가 되었다. 내 딸을 혼자 키우며, 나 혼자 돈을 벌고, 나 혼자 자아 실현 따위를 해야 한다. 같이 가는 건 없다. 누군가와 함께, 라는 말은 이제 내겐 환상의 그림자일 뿐이다. 강해져야 한다는 믿음 같은 걸 이제 와서 강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강해져야만 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하다. 그 긴 시간을 뚫고 아이까지 데리고 나와 이혼을 한 나는, 강하다.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이에게 영원히 속해 있을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괴롭게 불행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뿌리치고 나왔다.


전 남편과 나는 서로의 유책 사유가 있어서 이혼한 게 아니다. 서로에게 지쳤고, 서로에게 영속될 수 없음을 시시때때로 확인했으며,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작성한 계약서를 파기했다. 계약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9년 간의 계약은 달고 썼다. 가끔씩은 행복했으나 대부분 무미건조하거나 불행했다. 나는 그 종잇조각을 기억한다. 우리가 꾹꾹 진심을 눌러 담아 썼던 우리의 계약서를. 혼인 신고서를 말이다. 한바탕 잔치는 끝났고, 계절은 바뀌었다. 나는 이제 다른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만 한다. 딸의 손을 담담히 잡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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