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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Jun 26. 2023

너무나도 특별한 나.

이제 별다를 것도 없다는 걸 아는데, 인생의 꼴이 어떻게 잡혀가는지도 알겠는데도, 특별한 나를 포기 못하는 나. 내겐 너무나도 특별한 나. 앞으로 내가 일확천금을 벌 수도, 무지막지하게 팔리는 책을 쓸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언제나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언젠가는 멋진 글을 멋드러지게 써서 출간할 거야! 하고 결심하는 나. 그런 나에게 딸린 식구, 내 딸. 내 딸조차도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귀엽고 총명한 내 딸을 내 딸로 둔 나라는 엄마. 나는 엄마. 엄마인 것조차 특별한 나. 지금은 살이 쪄서 못 입지만 예쁜 옷들을 잘 소화하는 나. 그리고 아픈 나. 조울증인 나. 소품처럼 내 인생을 꾸며주는 그놈의 병증. 이제는 출근을 하게 되어서 풀타임잡을 뛰는 나.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 돈을 버는 나. 돈을 벌면서 취미생활도 하는 나. 친구들을 만나는 나. 딸과의 미래를 걱정하는 나. 나는 너무 멋져. 너무 멋져서 감당이 안 돼.


사실은 비루한 나. 딸을 버거워하는 나. 맡긴 일도 겨우 하는 나. 힘내고 싶은데 힘을 낼 수가 없는 나. 아침마다 먹는 조울증 약이 너무 싫어서 속으로 작게 욕을 하고 마는 나. 베란다에서 쪼그려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때문에 집값 떨어질까 걱정하는 나. 그래도, 그래도, 저 멀리 미래를 꿈꾸는 나. 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노래해 보는 나.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임을 자처하는 나. 다시 일어나는 나. 내겐 너무나도 특별한 나. 언젠가는 떠날 거라고, 이 바닥을 뜰 거라며 으스대는 나. 눈에는 별빛이 가득하고 머릿속에는 솜사탕 구름들이 뭉게뭉게. 항상 어딘가로 날아가려고 날개를 파닥이는 나. 인간을 혐오하는 나. 인간의 냄새마저 혐오하는 나.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전 남친과의 관계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나. 그러다가도 또 휙 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나. 초조했다가 평온했다가 불안했다가 노곤해지는 나.


무지개를 꿈꾸는 나. 내겐 너무나도 특별한 나. 비가 오는 날이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빗물을 마시는 나. 나는 이제 내가 크게 변할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엄마가 한때 그랬지, 너 대단한 사람이 될 필요 없다고. 엄마, 나는 말야, 항상 어릴 적부터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언젠가 멋진 작가가 되어서 사람들을 깜짝 놀래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내가 꾼 꿈들이 너무나 허무맹랑한 것이었을까? 이제 나는 딸까지 둔 엄마가 되었어. 내가 이 세상에서 깨우쳐 나가야 할 것들이 아직은 많고 많은 걸까? 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두근두근하는 심장이 이따금 너무 아파서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 그런 두근두근한 날에는 음악을 들으며 한없이 창밖을 바라다봐. 그런 날에는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야.


나는 날아가고 싶어. 꿈꾸고 싶어. 꿈꾸다 죽고 싶어. 이러다 몸이 삭아 공기라도 되어 버리면 어쩌지 하며,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어디론가 푹 하고 파묻히고 싶어. 쏜살같이 달려가고 싶어. 비오는 새벽에 어딘가로 마구 질주하고 싶어. 내 몸은 낡아가는데 내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있어. 난 특별한 나이고 싶어.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하나, 나 하나만 기능할 수 있는 무엇이 되고 싶어. 바람에 몸을 싣고 날아가다가 속도를 이기지 못해 팍 튕겨져 나가고 싶어. 바다로 빠져들고 싶어. 무지개를 붙잡고 싶어. 나는 아름다운 글을 만지고 싶어. 나는 펑펑 울고 싶어. 펑펑 울다가 코를 팽 풀고 따뜻한 햇살 아래 노곤히 잠들고 싶어. 거대한 열대 우림 속 이끼 위에 앉아 개울에 발을 담그고 싶어. 난 영원히 여름이고 싶어. 알겠니?


죽음이 다가온다. 죽음이. 성큼성큼 내 앞에 다가오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내가 죽는다니? 하고 헛된 물음으로 울부짖어봤자다.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른다. 나는 오늘 하루 살아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살았는가? 빗소리에 울진 않았는가? 조그마한 청개구리의 다리를 만져보진 않았는가? 쓰디쓴 담배를 연거푸 피우며 나는 생각한다. 연기처럼 붕 뜬 나는 또 헛짓거리를 떠올리고 있다고. 네가 특별하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해. 넌 전혀 특별하지 않아. 넌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넌 지구에서 태어난 먼지일 뿐야. 아주 하찮지. 그런데 이 하찮은 인간의 뇌에 하필 방대하고도 촘촘한 호기심을 짜넣어 놨으니 문제지. 하찮으면 하찮게 살아가면 되는데, 인간은 도통 그러지를 못해. 자기가 다 잘난 줄 안다니까.


서른아홉의, 이제 막 10년여의 경력단절을 딛고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조울증의, 이혼인의, 딸을 둔 여자는 바라는 게 많다. 여봐란 듯이 요구한다. 나는 원해, 원한다고. 나다운 삶을 원한다고. 빙글뱅글 돌아가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지 이제 서른아홉 해째. 이제는 좀 직선 구간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제 울 만큼 울지 않았냐고. 소리지른다. 울부짖는다.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에게 사정사정한다. 나 이대로는 못 죽는다고. 내 특별함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서야 죽지 못하겠다고. 참 나, 나는 내게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다. 터무니없이 특별해서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남들에게 이루 다 말할 수도 없는 이 특별함, 질식할 것만 같은 특별함.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는 오늘도 엄마와 싸우고 추어탕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똥을 눴다. 내 입은 너무 커서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면 다들 귀를 막아야 할 거다. 나는 그만큼 커다랗게 소리를 지를 수 있다. 나 여기 있소, 하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 나는 천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어느 날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없어지고 싶다. 나는 홀연히 이 세상에서 뜰 거다. 그 전까지 나는 내 특별함에 잠식된 채로 살 터다. 여전히 나는 특별하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나만의 열대 우림을 찾아 헤매면서. 한번 살아보자, 하며 손뼉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꼬나 물면서 말이다. 오른손엔 딸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세상에 내리는 무지갯빛 비를 막을 우산을 하나 들고.


아직도, 나는, 내가, 너무나도,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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