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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Dec 01. 2023

전남편에게.

OO 씨, 안녕하세요. 미야예요. 지난 주 토요일 우리 딸이 드디어 당신 곁으로 가게 되었지요. 당신이 꾸며 놓은 따뜻하고 포근한 집을 보며 저는 반성을 많이 했답니다. 딸이 만들어 온, 혹은 그려 놓은 쪽지 하나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저였어요. 당신은 아무렇게나 막 그린 우리 딸의 그림을 소중하게 냉장고 위에 붙여 놓았어요. 당신은 집에서 제일 채광이 좋고 따뜻하며 넓은 방을 우리 딸 방으로 주었지요. 당신은 말했어요. 우리 딸이 내 집에서 가지고 놀았던 모든 장난감들을 싹 다 가져오라고요. 덕분에 내 집에는 내 딸의 흔적조차 없어진 듯해요. 모든 것이 당신 집으로 옮겨졌으니까요. 그래도 손님이라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를 간식으로 내놓은 당신의 마음에 고마웠어요. 하지만 당신이 불편해할까 봐 얼른 딸과 인사를 마무리하고 나와 버렸지요. 저는 울지 않았어요. 딸은 당신을 정말이지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어요. 그 사랑에는 확신이 있어요. 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딸이 나를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그게 확신이 안 선다는 거예요.


내 병증과 내 기이한 행동들, 조울증 때문에 저질러 놓은 모든 사건들의 전말을 조금 알게 되었지요, 당신.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봤을까요. 내가 올해에만 벌써 두 번이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지요. 그리고 아직 병증 때문에 사회 생활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요. 당신은 그런 것들을 다 알고 나를 배려해 주고 있지요. 양육비도 100퍼센트 내야 하는데 30퍼센트만 내라고 한 것도 나를 배려한 것이겠지요. 내가 병증 때문에 아직도 방황 중이고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어요, 당신은. 이런 시기에 당신이 우리 딸을 갑자기 떠안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군말없이 묵묵히 친권자 양육자 변경 신청을 마무리하고 전입신고를 하고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방을 꾸미고 하는 걸 보며 당신에게 존경심이 들었어요. 아, 당신은 우리 딸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감수하고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있구나, 하고요.


여자친구가 생겼다지요, 당신. 분명 멋지고 착한 여자일 듯해요. 당신이 선택한 여자니까요. 우리 둘, 연애할 때만 해도 태양처럼 빛나던 내 모습과 조금은 닮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질투는 나지 않아요. 그저 부러워요. 일도 사랑도 육아도 다 해내려고 하는 당신의 모습이 너무 대단해 보여요. 난 지금껏 살면서 당신만큼 남자를 사랑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거의 9년을 살았죠, 우리. 당신은 내가 여러가지로 변덕스럽고 병증이 있고 게으르고 융통성이 없으며 고집이 세다는 걸 알고서도 결혼을 강행했어요. 날 사랑해 주었죠. 정말이지 당신에게 받은 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것이었어요. 언제나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 언제나 내가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내 남편이 바로 당신이었으니까요.


난 또 이런저런 남자들을 만나며 연애를 할 테지만, 절대 당신과 살면서 느꼈던 포근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딱 그 시기에만 빛나던, 온 우주가 우리를 도와주는 듯했던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래요. 그만큼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지요. 세찬 강물을 건너 부드러운 풀밭으로 풀썩 뛰어들게 만들어 주었어요. 나는 당신을 정말이지 사랑했답니다. 가끔 당신과 여행 갔던 사진들을 돌려봐요. 강화도에서 석양을 등지고 찍은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신이 내 볼에 뽀뽀를 하고, 나는 세상 행복한 듯 활짝 웃고 있던 사진이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했던 우리들, 우리들은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말았어요. 우리 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놓고 말이죠.


당신과 이혼한 건 후회 없어요. 당신도 그럴 것 같아요. 우리는 더 이상 교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렇게 되도록 서로 방치했어요. 괜찮아요, 이젠. 사랑의 힘이 다한 걸 어쩌겠어요. 중요한 것은 당연히 우리 딸이에요. 우리 딸을 위해서 우리는 절대 헤어질 수가 없지요. 내가 누누히 말했듯이, 우리 딸을 위해서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연결되어 있어야 해요. 그 어떤 역경이 부딪쳐 와도 나는 우리 딸을 보러 갈 것이고, 지킬 것이고, 도와 줄 거예요. 지금은 우리 딸을 당신이 키우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잖아요. 우리 딸이 지금 현 상황에 대해서 조금씩 인식해 나가는 동안 우리는 좀 더 노력할 필요가 있겠어요. 내년 우리 딸 생일에 셋이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죠. 나는 그날을 너무나 고대하고 있어요. 우리 딸에게 엄마 아빠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요. 당신도 동의했죠. 너무 고마워요.


아직은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일단은 조울병 치료에 중점을 두고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답니다. 12월 12일에는 제주도에 가요. 부모님과 함께 가는데 렌트카를 빌려서 섬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당신은 크리스마스에 우리 딸과 어디로 놀러를 간다지요. 좋은 경험을 많이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요. 내가 따로 말 안 해도 어련히 잘 하실 당신이지만요. 우리 딸을 사랑해 주어서 고마워요. 우리 딸의 아빠가 당신이라 고마워요. 직장 생활을 해 가면서 아이를 키우기 쉽지 않을 텐데도 선뜻 아이를 맡아 주어서 고마워요. 당신이, 당신이라 난 너무 고마운 거 있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 헤어질 마음이 없답니다. 우리 딸을 위해서요. 일상으로 회복이 좀 되고, 병증이 완화되어 무슨 일이라도 빨리 찾도록 노력해 볼게요. OO 씨, 고마워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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