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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Feb 21. 2024

조금 스러져 있지만 괜찮다.

조금 스러져 있지만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일도 안 하고 매일 엄마가 차려 주시는 점심밥을 먹고 아침 저녁으로 조울증 약을 먹고 살고 있지만 괜찮다. 월세를 준 세입자에게서 매달 85만 원의 돈이 들어온다. 그 돈으로 나는 살아간다. 사치품 같은 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커피와 담배에는 조금 돈을 쓴다. 책은 빌려 보거나 아주 필요하고 읽고 싶은 것만 한두 권 사는 편이다. 먹는 것은 어차피 집에서 다 해결되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넌 최소 2년은 일 안 하고 살아도 충분하니까 당장 일자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제발 조울증 관리에만 집중하라고. 또 조증이 와서 폐쇄병동에 강제 입원하게 되는 것보다 쉬면서 병증 재발이 안 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취직하고 싶었다. 어디든. 어디에든 소속되고 싶은데 당장은 내가 이 소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지난 십 몇 년간 몸담았던 출판과 관계된 사업장은 이 소도시에서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강제로 반백수가 되었다.


그래, 조금쯤 스러져 있어도 괜찮다. 비록 한 달에 한 번씩 심리상담을 받으러 엄마와 가면서 딸을 데려와 며칠 보내는 게 내 대부분의 행복의 전부이지만 말이다. 이번 달은 운이 좋아 딸을 두 번 보게 되었다. 저저번 주에 딸이 와서 6일을 있다가 갔다. 딸은 엄마 사랑해, 가족들은 전부 OO이를 사랑해, 하면서 나와 함께 잠을 잤다. 같이 살 때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하고만 자려고 들더니 떨어져 있게 되니 딸은 좁은 침대에서 나와 자는 것을 선택했다. 엄마는 딸이 내게 안기는 것을 보며 뿌듯해하셨다. 딸은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언어로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엄마, 나는 백만큼 엄마를 사랑해.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천만큼 OO이를 사랑해. 숫자는 계속 올라가고 우리는 침대에서 서로를 간지럽히며 웃었다. 행복. 행복이었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라는 책에서 아모르 파티(네 운명을 사랑하라)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배웠다. 운명과 죽음을 동시에 떠올리라는 말이 짐짓 아이러니같지만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길게 보았을 때 우리의 삶과 죽음은 결코 끊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자연의 섭리다.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 아주 당연한 이치다. 나는 죽음을 떠올리면 동시에 희망이 생긴다. 죽음을 생각하면 오늘이 더욱더 생생해지는 것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바로 이 찰나가 가장 소중해진다. 스러져 있지만 맹렬히 살아 있고 싶어졌다. 나는 회복 탄력성이 좋은 놈은 아니다. 그러나 항상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놈이다. 누가 누가 더 힘이 세나 따져 보자. 오뚜기처럼 번쩍 일어나진 못해도 가슴 한구석에 희망을 놓진 않는다. 난 항상 그러고 싶다.


요즘 내 행복은 책을 보며 소소하게 서평을 쓰는 일이다. 거창하게 한글을 켜고 쓸 때도 있고, 폰의 메모장에 급히 휘갈기며 쓰기도 한다. 밑줄을 긋기도 하고 마음속에 되뇌려 외우기도 한다. 오늘은 한소범의 <청춘유감>이라는 책을 읽었다. 한국일보의 현직 기자인 저자는 첫사랑인 문학과 자신이 가진 직업인 기자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자신의 과거를 계속해서 조명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학이 너무 좋아서, 대학교 동아리도 문예창작회로 들어갔고, 시를, 시나리오를, 소설을, 동화를, 에세이를 혼자서 써내려갔다. 하지만 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작가가 되지 못했고 그 대신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게 되었다. 저자가 문학을 첫사랑이라고 표현하듯 나 역시 문학을 짝사랑하고 있다. 언젠가 멋드러진 소설을 써 볼 거라고 위풍당당하게 한글을 켜지만 결국 작은 구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던 지난 날들이 떠올랐다. 대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어느 쪽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나는 충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애매하다는 것인데, 그 애매한 게 항상 나쁜 건 아니다. 애매한 채로 내가 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읽혔다. 나는 문학을 짝사랑하며 작가를 꿈꾸고 항상 마음속 한켠에 끝내주는 소설을 쓸 거야! 하는 외침을 담고 있다. 비록 <청춘유감>의 저자는 작가가 되기를 그만두고 전문 독서인으로서 문화부 기자일을 맡고 있지만 나는 그가 언젠가는 멋드러진 소설 하나를 써내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쓰고 싶다는 욕망은 겪어 본 이라면 알듯이 거센 폭풍우 같은 것이다.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면 마음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친다. 그토록 강력한 것이다. 쓰고 싶다는 욕망은 말이다. 멈출 수도 없고, 멈춰지지도 않는 그 욕망. 쓰고 싶다는 것.


나는 더 이상 편집자도 아니고 책을 만들지도 않는다. 대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온갖 멋진 문장들을 마음에 담고 조심히 쓸어본다. 아마 이 소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무직이나 알바 같은 단순 노동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편집자는 더 이상 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만들지 못하게 되더라도 책을 읽을 수는 있으니까, 그것을 바탕으로 글이라도 쓸 수 있는 공간이 내게 허락되어 있으니까 괜찮다. 영원히 문학을, 작가가 됨을 짝사랑하면서 살아도 좋다. 조금쯤 스러져 있는 나는, 아침 저녁으로 조울증 약을 털어넣는 나는, 멀리 사는 딸을 한 달에 한 번씩 보며 잠깐의 행복감을 만끽하는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오늘도 나는 책 한 권을 빌려와서 읽었고, 그 사람이 되어 잠깐 나 자신을 환기시키는 경험을 했다.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이 애매하고 이상한 상황에서 나는 묵묵히 읽고 쓰는 것을 놓지 않을 것이다. 희망은 도처에 있다. 그것을 잡아채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희미해진 안경알을 닦고, 예리하게 모든 걸 살피는 것이다. 혹여라도 내가 놓친 것들 사이에 행복이 고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 자신을 닦자. 스러져 있는 팔다리를 조금쯤이나마 꿈틀거려 보는 거다. 그리고 나는, 쓴다. 끊임없이, 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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