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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Feb 22. 2024

어느 조울증 환자의 하루.

아침 9시 정각에 일어난다. 일어나자마자 우유에 선식을 타서 조울증 약을 삼킨다. 방청소를 간단히 하고 세수와 양치를 한다. 세수 후에는 스킨과 로션, 수분 크림을 얼굴에 듬뿍 발라 준다. 벌써 일어나 있던 엄마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오늘 나는 약속이 있어, 난 어디에 가야 해, 따위의 말들. 그러고는 짐을 챙겨서 도서관으로 간다. 문학이든 인문서든 에세이든 장르에 상관없이 책 한 권을 고르고 2시간 정도 읽는다. 지루해질 때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와 함께 점심을 차려 먹는다. 엄마가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면 나는 엄마가 해놓고 간 반찬들을 준비하고 밥을 데워서 먹는다. 먹고 나서는 꼭 설거지를 해야 한다. 이래저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오후 2시, 3시가 되어 있다. 비가 오는 날 빼고는 엄마와 30분 정도 걸으러 나간다. 엄마는 운동 가자고 하시지만 나는 굳이 산책이라고 강조한다. 운동이라고 말하는 순간 가기 싫어지기 때문이다. 운동을 다녀와서는 엄마는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나는 오전에 빌려왔던 책을 읽고 글을 쓰거나 혼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저녁이 된다. 엄마는 혼자 밥상을 차려 티비 앞에서 드시거나 한다. 나는 저녁을 먹지 않는다. 내 방과 거실 티비 앞을 왔다갔다 하고 엄마와 대화를 하다 보면 저녁 9시가 된다. 9시가 되자마자 나는 저녁 약을 먹는다. 엄마의 영어 공부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방에서 또다시 브런치를 들락거리거나 블로그에 서평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10시가 되면 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잠에 든다. 이게 요즘 내 하루의 전부다.


2021년 6월에, 2022년 8월에, 2022년 12월에, 2023년 8월에 조증이 심각하게 왔다. 2023년 1월에, 2023년 11월에 정신병동에 입원을 했다. 파도처럼 조증은 내게로 왔다 갔고, 지금은 약을 먹으면서 많이 가라앉았다. 나는 부모님의 케어를 받으며 부모님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며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빠듯하게 살아간다. 엄마가 그랬다. 부모라고 다 이렇게 하는 건 아니라고. 네 병증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지면 나도 널 내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겁을 줬다. 내가 가는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은 봄을 조심해야 한다며 며칠 전 약 처방을 새로 해주셨다. 조증 기간 동안 수많은 사고를 쳤고 내 몸을 방치해 버렸다. 가장 최근에 왔던 조증 때문에 나는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돈은 모래처럼 내 손가락 위에서 빠져나가 버렸고, 부모님은 몇 번의 절망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나는 한 사람에게 집착하여 그를 교묘하게 괴롭혔으며 결국 나를 떠나게 만들었다. 수많은 남자들을 만났고 수없이 돈을 썼다. 나는 점점 망가져만 갔다. 엄마는 또 말씀하셨다. 올해 2024년이 관건이라고, 올해도 또 조증이 도지면 넌 진짜 불구가 되어 버릴 거라며 우셨다. 나 역시 도대체 이놈의 조울증이 뭐길래 날 이렇게 힘들게 하나 매번 잠들 때마다 괴로웠다. 약을 털어 넣으면서도 의심했다. 약 기운을 이기고 그 조증이라는 놈이 또 나를 잠식해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니면 어쩌지 하고. 또다시 그 혼란스러운 폭풍우 속에 나를 내던져 버리면 어쩌지 하고.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딸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내 딸 앞에서 당당해질 수 없다면 내겐 절망뿐일 거라고. 이혼하고 수없이 방황했다. 아이를 방치했고 술을 마셨고 노래를 불렀다. 창녀처럼 입고 돌아다녔다. 그놈의 돈, 돈, 돈을 수없이 써댔다. 아이를 재우자마자 나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술을 마시러 나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미친년이었다. 아이와 산책 나가는 길에서도 나는 몰래 담배를 입에 꼬나 물고 그 더러운 손으로 아이 손을 잡고 돌아다녔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도 안 쓰였다.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괜찮은 듯했다. 그렇게 미친 척 나를 내팽게쳐 버려도 괜찮을 것 같던 나날들. 이젠 까마득한 나날들. 하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조증이었고 또 언제 조증이 찾아올지 모르는 비상 상황이다. 내 이런 병증 때문에 아이는 전 남편에게 맡겨졌다. 졸지에 아이까지 내다 버린 나쁜년이 되었다. 모두가 말했다. 넌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어. 넌 아이를 키워낼 능력이 없어, 하고. 난 그런가 보다 했다. 아이를 보내고 나자 내 삶은 조금쯤 가벼워졌고 조금쯤 슬퍼졌다. 한 달에 한 번, 딸을 보는 날이 되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애뜻한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왜 사랑하고 그리운 것은 헤어지고 나서야 그 마음의 깊이를 알게 될까, 하고. 빌어먹을 조울증 때문에 대체 내가 잃은 게 몇 가지나 되나 싶었다.


긴 터널 같았던 연애도 끝났고, 딸을 보내고, 조증이 가라앉을 만하니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나는 지금 필사적으로 내 마음의 구멍을 메우는 중이다. 책을 읽고 쓰고 사유한다. 최근에 새로 독서 모임 두 곳에 가입하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찬란히 빛나는 듯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며 퇴근한 후 잊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사회 생활이 너무 힘든 나에게는, 일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는,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지고 대단해 보였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읽은 책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그 시간들로 인해 나는 조금쯤 생기를 찾은 듯하다. 여전히 산책은 나가기 싫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조금 더 자고 싶어서 뒹굴거리지만 꽤 괜찮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날은 엄마와 싸우고 서로 소리를 질러 대도, 또 어떤 날은 내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세우려 둘이 머리를 맞댄다. 우리 엄마, 그 사람은 철인이다. 나를 위해서 조울증 전문 교수의 강의도 듣고, 조울증 환자들의 부모님들이 하는 줌 수업 같은 것도 찾아 듣는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 내게 힘이 되어 주는 말들을 건넨다. 그녀는 철인이다. 그녀는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녀는 말한다. 네 외로움 구멍을 채워 줄 무언가를 찾아야만이 네가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 되풀이해서 말한다. 밥을 차리면서, 안 되는 영어 공부를 하면서, 내가 먼저 내 속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지금 외로움 구멍을 맹렬히 채워 가는 중이다. 읽으면서, 쓰면서, 사유하면서.


나는 구질구질하다. 개구질구질하다. 끝도 없이 미련을 떤다. 몸무게는 고무줄 같아서 살이 쪘다 빠졌다 찌기를 반복한다. 올해 조증이라는 놈이 내게 또 찾아오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데파코트, 세로켈, 솔리안 같은 약들을 먹으며 나는 갑자기 깨어나고 천천히 잠든다. 그래, 나는 환자다. 나는 하루라도 약을 빼먹지 않고 먹어야 하는 환자다. 더이상 단약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약 없이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약은 생명처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 피부 관리를 하는데 변해 가는 내 모습을 지켜 보는 게 즐겁다. 전에는 항상 칙칙하고 검버섯이 핀 것처럼 우중충한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삶은 달걀처럼 뽀얗고 맨들맨들해졌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갈 거라며 엄마에게 으스댔다. 엄마, 있잖아, 나는 많은 걸 원하는 게 아냐. 내가 바라는 것은 항상 똑같아. 마음속에 희망을 품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종달새가 되는 게 꿈이야. 내가 생각하는 나와 현실의 내가 일치되려면 나는 지금보다 숱한 실패의 과정을 겪고 또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불쌍한 엄마. 나 때문에 자기 일생을 할애한 엄마.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나도 엄마다. 엄마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조울증 환자. 한 달에 한 번 딸을 만나러 가는 그런 엄마. 약 없이는 못 살고, 항상 경계선 안에서 조마조마 마음을 붙들고 서서 안달복달하는 엄마. 그런 게 내 딸의 엄마인 나이다.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용솟음 치는 힘이 필요하다. 내 안에 소위 선순환의 에너지가 흘러넘쳐야만 한다. 나는 패배했고, 또 넘어졌다. 평생을 조울증을 관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누구 때문에, 누구의 존재를 위해서 나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존재가 딸이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그것을 심각한 조증을 겪으며 깨달았다. 병증이 도지기 시작하면 딸도 엄마도 그 무엇도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다는 것을. 내 천사인 딸마저도 내 병증을 이기기 위한 목적이 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나로 존재해야만 한다. 내 삶의 이유가 나여야만 한다. 그게 아니면 백날 처방전을 받고 약을 먹고 심리상담을 받아도 고칠 수 없다. 이 지랄 맞은 병인 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저 살아만 있으면 좋으련만 생은 그걸 허락치 않는다. 무언가 원동력이 필요하다. 진짜로 살아 있으려면 말이다. 인간이란 건 참 서글프다. 안타깝다. 도저히 딱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다면적인 존재. 각자의 심연을 가진 존재들. 나는 멀쩡히 인간으로 기능하고 싶다. 비록 병증은 날 놔주지 않고 이렇게 내 안에 도사리고 있지만, 나라고 멀쩡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사회생활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며 언젠가 같이 살게 될지도 모르는 딸을 위해서 나를 갈고 닦고 싶다. 어느 조울증 환자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난 선선했으며 재치가 넘쳤고 차분하기도 했으며 입을 쫙 벌리고 웃기도 했다. 외로움 구멍을 메워 줄 무언가를 찾아헤매면서 나는 오늘도 살았다. 잘했다. 살아 있어서. 잘됐다. 살아 숨쉬고 있어서.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진창에서 조금쯤 발을 빼고 있는 중이다.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야, 살아가렴. 나 같은 생도 생이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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