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미아 Oct 07. 2024

이혼한 지 3년.

전남편과 2012년 6월 3일 날 처음 만나 2012년 11월 21일에 혼인을 하고 2019년 10월 11일에 딸을 낳고 2021년 6월 15일에 이혼했다. 거의 9년에 육박하는 결혼 생활의 끝. 그리고 그 후 3년이 지났다. 오늘은 2024년 10월 7일. 십수 년에 걸쳐 고통당해 온 내 조울증은 이혼하고 폭발적으로 심해졌다. 3년 동안 방황만 했다. 대놓고 방황했다. 이혼하고 딸을 홀로 키우다가 2023년 11월 25일에 전남편에게 딸을 보냈다. 도저히 잡히지 않는 조증과 계속되는 정신병동 입원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의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고 하루하루 딸을 케어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그럴 정신이 못 되었다. 나는 휘청였고 항상 우울하거나 들떠 있었고 마치 두 발이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유랑하며 살았다. 이 좁고 작은 도시에서 나는 그렇게나 돌아다녔다. 정신을 못 차리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만났고 술을 마셨다. 내가 그렇게 뇌가 쾌락과 침울에 쩌들은 사이 전남편은 건실하게 면접교섭을 이행하고, 딸을 데려가고, 그 와중에 안정적인 연인 관계까지 만들었다. 그 사람은 경제적으로 자립했고, 삶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며, 딸을 아꼈다. 나는 툭 하면 떠났고, 툭 하면 정신을 잃었다. 나는 주저앉았다, 완전히. 진창에서 뒹굴었다. 쓰레기조각들을 집고 보물인 양 소중히 품으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냥 미친년이었다. 그야말로.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렇다. 난 돌아 있었다.


이혼의 여파가 그렇게 큰 줄 진심으로 몰랐다. 응, 몰랐다. 내가 강력히 주장한 이혼이었고, 전남편은 부부상담을 권했지만 난 끝내 거절했다. 사실 누가 먼저 이혼하자고 이야기한 건지 기억도 안 난다. 마지막 싸움에서 나는 너무 처절했고 비참했다. 이혼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내 의사를 관철한 끝에 전남편은 수긍했고 우리는 협의 이혼을 무사히 마쳤다. 난 진짜 내가 잘 살 줄 알았다. 무려 3년 동안이나 방황할 줄은 몰랐다. 이혼할 당시에는 무슨 그런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당장 풀잡을 뛰고 딸을 잘 보살필 거라 생각했다. 멋진 싱글맘으로 살아갈 거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내 병증은 화마처럼 날 덮쳤고 3년이나 날 놔주지 않았다. 잊을만 하면 찾아오는 조증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집을 나갔다. 새벽에 우는 딸을 두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엄마 아빠를 두고, 나는 멀리 멀리 떠나다녔다. 마음은 슬펐다. 딸을 보면 눈물이 났고 엄마를 보면 화가 났다. 내 병증에 대해서도 화가 났다.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흔들리는지도 몰랐다. 나 없이 잘만 사는 전남편이 미워졌다가도, 딸을 데려가 잘 케어해 주는 모습을 보면 고마웠다. 모든 것에 양가감정이었다. 미웠다 싫었다 좋았다 지겨워졌다가. 그냥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어떻게 하면 안정을 되찾을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떠밀리는 대로 이리저리 치여 살았던 것 같다. 쓰레기장을 뒹굴며 진주를 찾아다녔다.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대했다. 몇 번의 반복된 실패와 좌절은 나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내 영혼은 너덜너덜해졌다. 엄마는 자꾸만 아프고, 딸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그래, 난 내 스스로를 시궁창에 처넣은 범인이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탓. 내 스스로가 그 시궁창으로 걸어들어가 한참을 헤맸다. 3년이었다.


마침내 스스로 시궁창에서 걸어나온다. 손에 소중히 들고 있던 쓰레기조각을 버리고. 내가 빠져 있던 곳이 쓰레기장이었다는 걸 깨닫고. 내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왔는지, 무슨 생각들로 하루하루를 버텼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헛된 꿈을 꾸었고, 병증에 휩싸여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며,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보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증명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엄마고,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단단하게 서 있어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절망스러워도 서야 한다. 드디어 새장의 문을 열고 나왔다, 희망을 노래하는 종달새는. 훨훨 날아오르기를, 자유롭게 허공을 가로지르기를. 스스로 잠근 자물쇠를 깨부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내가 두려워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원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나는 홀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해답이다. 이렇게 해방된 기분은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이제야 이혼의 여파를 뚫고 나와 숨 좀 쉬는 것 같다. 이제야 이혼을, 그 잔혹했던 시간들을 통과하고 터널 밖으로 나온 기분이다. 이제야 내가 보이고 딸이 보이고 엄마 아빠가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 그동안은 내 심연만 깊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검고 짙은 색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파랬다. 아니, 총천연색이었다. 빗물은 달고 아름다웠으며 딸의 눈망울은 빛났다. 감각이 드디어 제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삐걱거리며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난 오아시스의 <The Hindu Times>를 들었다. '난 믿어, 내게 불꽃이 남아 있다는 걸, 난 빠르지, 난 허공을 걸어다녀'라는 그 가사를 들으며 나는 또다시 일어난다. 비로소, 다시 만난 세계. 비로소.


지난 금요일 날 딸의 생일 파티를 했다. 딸이 좋아하는 토마토 파스타를 먹으러 갔었고, 집에 와서 딸이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매해마다 반복되는 생일 파티이지만 딸은 항상 좋아한다. 그래, 난 딸이 있다. 3초면 무언가를 까먹는 붕어처럼 나는 딸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며 살아온 것 같다. 이젠 항상 딸이 내 곁에 있다는 걸 생각하며, 내가 죽기 전까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야겠다. 비록 딸은 전남편의 품속에서 길러지고 있지만, 때려죽여도 친엄마는 나라는 것. 전남편이 재혼을 한들, 죽은들, 멀리 떠나간들, 나는 악착같이 살아서 딸의 곁을 지킬 거라는 것을. 정신적, 경제적 독립을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며,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다하며,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할 것이라는. 그런 각오를 했다. 딸과 카페에 갔는데, 모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딸이 너무 예쁘고 똑똑하다며 용돈을 주셨다. 살아가면서 항상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내 딸만큼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간으로 키우고 싶다. 쓰디쓴 시련이 와도 이겨내길, 회복탄력성이 나보다는 월등하길, 미소를 잃지 않길. 그러려면 우선 엄마인 내가 행복해져야 한다. 내 행복을 딸에게 전염시킬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난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 안에는 아직 욕망이 가득하고, 불꽃이 일렁이며, 활활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강하게 마음 먹는다. 절대 시련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시궁창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지 않겠다고. 절대로 병증에 지지 않겠다고. 약으로, 산책으로, 규칙적인 생활 루틴으로 병을 잡아서 꼭 멀쩡히 사회생활 해보겠다고. 남들처럼 좀 살아보겠다고 각오한다. 나도 안다, 항상 유의미한 문장만을 쓸 순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번엔 진짜다. 내 안의 마지막 쓰레기 찌꺼기까지 덜어낸 다음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내 안의 모든 양분을 나 자신에게 쏟아부어서, 무럭무럭 자라게 해야지. 기어코 꽃 한 송이를 피워 내야지. 그 향기를 딸에게 맡게 해 주어야지.


작가의 이전글 불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