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소일기> 시사회 리뷰
탁역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연소일기>는 11월 13일 개봉 예정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는 아시아의 주요 영화제에서 7개 부문에서 수상, 26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이 작품은 사람의 쓸모를 함부로 재단하는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한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빠르게 잊힐 것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쪽지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둔 만큼 조용히 넘어가려는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정 선생은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를 대조하던 정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으로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들게 된다. 그리고 기억 속에 묻어버린 어린 시절을 마주하게 된다.
요우제는 열 살 소년이다. 엘리트 변호사인 아버지는 아들들이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길 바란다. 그래서 자녀 교육에 엄격했고 이를 위해 폭력이 좋은 교육방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동생 요우쥔은 어떤 분야든 뛰어난 학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 형 요우제는 만화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다른 두 형제를 철저하게 차별했고 없는 사람 취급받기 일쑤였다. 홍콩대에 다니는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 학창 시절 매일 일기를 썼다는 말을 듣고 요우제는 똑똑해지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실패했고 돌아오는 건 책망이 섞인 매질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좌절감과 소외감을 애써 숨길 뿐이었다.
열심히 쓰다 보면 바라던 좋은 어른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한 이 일기 뒤에는 열 살 소년 요우제가 보인다. 요우제는 가족으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존중받지 못했다. 밝은 미소 뒤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오로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뿐이었다. 걱정 없이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모습이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 속의 내용이 비현실적이지 않아 더욱 공포스러웠다. 첫 장면은 한국 영화인지, 홍콩 영화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현실이 담겨 있어서 괜히 움찔했다.
얼마 전, 의대에 가려면 초등학교 5학년에 고등학교 2학년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처럼 한국은 무한경쟁체제 사회이다. 이러한 경쟁력이 한국의 발전에 발판이 되었지만 무한 경쟁이 대한민국을 잠식하는 결과를 빚어내었다. 공부는 계층이동의 유일한 수단으로써 이러한 경쟁을 부추긴다. 학력과 학벌에 따른 노동 임금 차별, 좁은 취업문으로 학교 경쟁을 증폭시켰고, 극심해지는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서로 상위 계층에 진입하기 위해 과잉 경쟁하는 현재가 되었다. 남보다 앞서지 못하면 내가 뒤쳐진다는 그 생각과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낙오된다는 그 생각은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과연 이러한 경쟁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 뭐길래 어린 소년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그 마음가짐과 스스로를 쓰레기라 여기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열 살 소년이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요우제,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넌 꼭 홍콩대에 가야 해". 정말 끔찍한 말이었다. 인성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돈과 명예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개인이 무너지면 가족과 사회, 그리고 나라가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모의 과한 교육열, 그리고 애정을 빙자한 폭력, 청소년들의 고립감은 스스로를 사회에서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쓸모, 가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그리고 '사람'에 쓰여서는 안 될 말들이 온갖 수식어로 붙는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존엄과 행복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고 함께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느끼지 못했던 건 요우제뿐만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 사랑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건 요우쥔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고 정해진 목표를 성취하는 게 더 우선이라는 것을 먼저 배웠던 요우쥔은 형 요우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진정으로 형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폭력을 당하는 소년과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힘들어하는 소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가 자신과 형을 온전히 마주하게 된 건 그의 과거와 교차되면서 자세한 사연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영화는 관객에게 완전한 이해나 위로를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고독과 무력함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의도적인 메시지를 위한 일부 극단적인 설정들이 다소 작위적일 수 있지만 반전요소나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아역 배우의 열연 덕분에 이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바로, 잠이 든 동생의 등을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다.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그 순간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 소년을 가족 중 누구라도 따스하게 안아주고, 가족으로 받아들여줬더라면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까. 이미 끝나버린 이야기지만 안타까움이 계속 남아 마음이 저려왔다.
두 번은 보기 힘든 영화가 될 것 같다.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일기라고 하기엔 한없이 어둡고 외로움으로 가득했고,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그 고독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래서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집중하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저 변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이 완전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허탈함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고독이 소년을 무너지게 만든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미 요우제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남겨진 이들이 아무리 그를 떠올리며 후회한들, 이미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스한 위로가 전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이어질 모습에 또 괴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