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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Dec 08. 2024

욕망 속에서 피어나는 추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영화 <서브스턴스> 리뷰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연출한 영화 <서브스턴스>는 2024년 12월 11일 개봉 예정이다. 제77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제49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매드니스 관객상을 수상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어떤 영화로 규정해야만 영화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그저 유머로 소비될 수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만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서브스턴스>는 바로 그러한 본질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영화이다. 단순하게 자극적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영화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매우 강렬하고 깊은 울림을 준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젊은 시절 잘 나가는 배우로 주목받았지만 사람들에게 잊혀 가고 있는 인물이다. 에어로빅 쇼를 진행하던 엘리자베스는 방송사 중역인 하비가 자신을 해고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큰 충격을 받는다. 그 충격으로 인해 운전 중 한눈을 팔다 교통사고가 나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에서 엘리자베스를 간호하던 남자 간호사가 그녀의 척추 부분을 만져보다니 당신이 서브스턴스에 적합할 것 같다며 USB 드라이브를 건넨다. 집에 돌아와 USB를 열어본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에 대한 홍보물을 보곤 "보다 나은 버전의 당신이 돼라"라는 문구에 무시하지만 해고되자 절박해진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 프로그램에 가입한다. '서브스턴스'로 엘리자베스의 젊은 클론이 생기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수', 대담하고 섹시한 수의 매력에 방송사 중역들은 물론 시청자들도 흠뻑 빠지게 된다. 인기에 도취된 수는 원래의 육체로 돌아가는 것을 꺼리게 되고 더 오래 활동하기 위해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물질을 빼앗아 가면서 엘리자베스의 육체에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브스턴스는 물질이라는 뜻으로 액티베이터라는 물질을 주사하면 잠시 혼수상태에 빠진 후 척추 부위를 통해 자신의 클론이 태어나게 된다. 이 클론은 자기 원래 육체보다 훨씬 젊지만, 정신을 공유하므로 클론이 활동하는 중에는 원래 육체는 혼수상태에 빠지며 일주일 간격으로 반드시 역할을 교대해야 한다. "REMEMBER YOU ARE ONE" 일주일 이내에 본래 육체로 돌아오지 않으면 클론에게 탈이 나며 결국 죽게 된다.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젊음에 대한 욕망보다 훨씬 더 한 일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곱씹어 보면 늙음의 추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늙음의 추함에 대한 것이 아닌 한 개인이 사회적 기준에 맞추지 못할 때, 스스로 어떻게 무너져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늙음의 추함 뿐만 아니라 젊음의 추함 또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지금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추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주입된 특정한 외모의 기준은 어느 순간부터 당연시되어 일종의 폭력을 미화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수많은 폭력이 모여 자신을 갉아먹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정해둔 미의 기준에 매우 적합하다고 볼 수 있는 '수' 또한 미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온전히 즐겼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욕망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 엘리자베스도 욕망에 집어삼켜진 괴물 자체가 되어버렸지만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되묻게 만드는 영화였다. 때론, 행복이라는 것이 허황된 꿈이 되기도 하며 행복함에 대한 강박은 질병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끊임없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것으로는 내면의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타인의 기준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사회에서 타인에게 인정을 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음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만큼 희귀하지만 그 생명이 매우 짧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젊음을 소유하기 위해 매달린다. 엘리자베스 또한 그러했다. 점차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는 반면,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 있음에도 꾸밀수록 이상해 보이는 겉모습을 감당하지 못해 끝내 약속에 나가지 못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평생 자신의 이미지로 살아온 만큼 그 꿈을 쉽게 버리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맞춰왔지만 오히려 그 기준에 의해 자신의 꿈이 너무 간단하고 순식간에 사라진 순간을 두 눈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늘 아름다운 순간에 머물 수 있게 도와주는 물질에 엘리자베스가 그 순간을 붙잡고 싶은 욕망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던 엘리자베스는 그 매혹에 사로잡혀 어떤 부작용을 앓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젊음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소비하는지, 우리의 사회가 늙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다움에 열망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드는 주체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선을 되돌려 젊음에 대한 욕망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욕망을 부추기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과 몸매를 불편할 정도로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를 비추며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자신의 포즈, 눈앞의 사람들, 그리고 카메라 플래시를 의식하게 되는 그런 불안감이 잘 표현되었다. 여자아이돌 직캠 영상을 보면 특정 부위를 줌인하거나 민망할 수 있는 장면을 확대하여 업로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 영화의 특정 베드신에 나오는 여자 배우들의 장면을 모아 편집하고 소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디어에서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고 왜곡하는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특정한 '미의 기준'을 정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말을 쉽게 배출하는 반면,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들의 수요에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원하고 아름다움을 갈구하지만 그것이 과연 올바른 방향인지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서로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며 그 지옥은 더욱 넓고 세세하게 펼쳐진다. 그 소비의 과정에서 여성의 '미의 기준'은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다. 누군가에게는 유머로 소비될 수 있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들은 서로를 별개의 주체로서 인지했지만 그들은 결코 각각의 객체가 될 수 없었다. "당신이 하나라는 걸 기억하세요"라는 말이 족쇄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벗어날 수 없다는 건 각자의 등에 있는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엘리자베스가 사는 곳은 지금 주목받는 여자연예인의 전광판이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압박감이 숨 막힐 정도로 가까워지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욕망을 포기할 수 없다. 어쩌면 많은 여성들이 겪고 있을 그 강박이 '엘리자베스', 그리고 '수'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를 통해 젊음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수는 자신이 될 수 없었으며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더 지속되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이유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이 추함의 욕망으로 이어진다는 그 말처럼 영화는 그 순간을 향해 달린다. "젊음이 주는 아름다움보다 자신이 더 의미 있는 존재를 망각해 갈 것이다"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자기 파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곳에 스며들게 된다. 누군가는 새드엔딩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결말이 그녀에게만큼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서브스턴스>는 정말 미쳤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영화다. 감독의 전작과는 전혀 다른 강렬함으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입을 벌리고 영화를 관람했을 정도다. 하지만 단순히 자극적인 영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런 바디 호러는 처음이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도발적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현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특히 데미 무어의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연기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복잡한 감정의 변화와 내면의 갈등을 완벽하게 표현하며 엘리자베스의 비극적인 욕망을 실감 나게 전달한다. 이렇게 미를 소비하는 방식이 한편으로는 불편하면서도 소비하게 되는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시각화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적나라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이 영화에서는 미덕이다.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방식 덕분에 이 영화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영화는 우리가 외면했거나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마주했을 때의 불편함을 온전히 느끼게 만든다. 특히 이러한 불편함은 관객이 영화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영화 속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는 촉매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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