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무장한 와인계의 '먼나라 이웃나라'
와인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첫째로는 포도가 담겨있고, 포도를 길러낸 자연의 시간과 사람들의 노고가 담겨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와인은 수 세기 전, 저 먼 낯선 땅의 누군가도 즐겼을 향과 맛이 담겨있다. 나폴레옹부터 헤밍웨이, 보들레르까지! 같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나와 그들도 와인을 좋아한다는 접점이 있다. ( 뿌듯 ) 물론, 와인을 조금 더 알게 됐다면 똑같은 와인이란 없다는 것을 배우겠지만, 그럼에도 분명 그들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와인을 마셨을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와인에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대화와 깊고 복잡한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물론, 깨고 나면 이불을 뻥 찰만큼 부끄러워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와인이 주는 그 시간들을 참 좋아한다.
오늘은 와인을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와인의 다방면을 소개해주는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와인이 좋긴 한데 아직 어려운 당신이라면 정말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을 이제야 만난 사실이 한스럽다. 본인은 와인을 좋아하게 된 후 3년간, 돌아서면 까먹는 기억을 모으고, 수업, 팟캐스트 그리고 모임을 통해 와인에 대한 산발적인 지식을 익혀왔다.
<와인잔에 담긴 인문학>은 내가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접했던 와인의 세계를
보란 듯이 손쉽게 소개하는 책이다.
본인은 와인을 참 좋아한다. 와인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로 떠난 교환학생이었다. 교환학생을 떠나기 전 위워크 커뮤니티에서 '와인 동호회'를 처음으로 접했고, 와인에 미쳐있는 나라로 떠나기 전 그 멋짐을 조금이라도 알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와인 테이스팅에 나가보았다. 패기 좋게 나간 와인 모임에서 나는 와인을 진지하게 대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와인의 오묘한 매력에 취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술을 음미하기보다는 정신없이 마시고 취하는 게 더 자연스럽던 나였기에, 정적으로 앉아서 와인을 음미하며 마시는 것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렇지만 물보다 와인이 더 싼 (?) 이탈리아에서 생활하고, 와인 수업을 듣다 보니 나는 유럽의 문화, 아니 세계의 식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와인은 쪽지시험도 수능도 아니다. 그저 즐기면 그만인 술이고, 문화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이 늘 그렇듯,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 사랑의 대상에 대한 모든 것을 모조리 알고싶어 지는 법이다. 와인이 좋아 재미있게 와인에 대해 더 배워보고 싶다면 이만한 책이 없다.
<와인잔에 담긴 인문학>은 쉽다고 얕보기엔 깊이 있고, 어렵다고 보기엔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이다. 사실 암만 와인이 좋다고 해도, 와인 전문 서적을 찾아 읽으며 몇 시간씩 공부에 할애할 만큼의 열정과 여유를 모두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와인은 어렵지 않다'라는 말로 와인 초보(동지)들의 경계를 풀어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와인은 인류와 함께한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족적을 남겨왔으니, 일종의 역사적 장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유럽사를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와인의 역사를 훑는 동안 백년전쟁, 십자군 전쟁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와인은 포도의 상태, 기후와 숙성 과정과 방식 등 수많은 변수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하자면 끝도 없이 확장될 수 있는 학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와인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와인은 필연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보면 이는 당연한 것이다. 역사도 물리학도, 심지어 해리포터마저도. 주제가 무엇이 됐건 작정하고 공부하려고 달려든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렵다는 세계사도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으며 익힌 위인들 아닌가! 물론 '먼나라 이웃나라' 한 권만으로 그 나라의 모든 역사를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여행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기초적인 지식들은 아주 손쉽게 재밌게 확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와인의 세계'에 재밌게 발을 담가볼 수 있는 와인계의 먼나라 이웃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로맨틱하고 근사한 와인과 관련된 저자의 추억을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제공한다. 특히 저자의 친구들과의 우정이 담겨있는 페트뤼스 2000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인상 깊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1.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듯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수상록은 가벼운 책은 아니지만, 한 편의 길이는 길지 않기에 손에 잡힐 때마다 조금씩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기분이 내킬 때 한 번에 한 편씩 가볍게 읽고, 순서와 상관없이 관심 있는 부분부터 읽어나가면 된다. 본인은 두꺼운 소설책은 늘 끝까지 읽지 못하고, 잡지는 무서운 속도로 읽어나가는 사람이기에,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TMI. 수상록의 저자인 몽테뉴는 보르도의 시장까지 지낸 인물로, 무척이나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그래서 소테른 지방의 최고 귀부 와인인 샤토 디켐 또한 몽테뉴 가문의 영지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몽테뉴가 우리에게 남긴 건 사색과 철학만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런 흥미로운 TMI들을 가볍게 배울 수 있다.)
2. 또 이 책은 최고의 와인 안주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은 와인을 마시며 읽기 좋은 책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와인의 출신과 배경이 궁금하다면? 어떤 종류의 포도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생충을 보면 괜히 짜빠구리가 당기듯, 책을 읽다 보면 와인이 자꾸 당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미리'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이 책을 읽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아무리 알쓰여도, 취하기 전에 읽고 싶은 부분을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3. 이 책은 와인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형성해주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와인은 단순 '술', '교양'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와인은 늘 한 편의 이야기였고, 분위기였다. 여행을 다니며 여러 와인을 마셨는데, 돌이켜보면 사실 와인의 맛과 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함께 와인을 마시던 사람과 나눈 대화, 혼자 와인을 마시며 멍하니 바라봤던 풍경, 뭐 이런 감성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와인을 발효의 과정, 품종 등 물리적인 여러 변수들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보단, 품종을 배우다가도 와인과 얽힌 찡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력적이었다.
이 때문이었을까, 이 책은 나를 한참 동안 추억에 잠기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마셨던 수많은 와인들이 떠올랐다. 리미니의 해변에서 알딸딸하게 와인을 마셨던 일, 토리노에서 웨이터와 친해져서 테이스팅을 빙자한(?) 와인 폭격을 받았던 일, 마트에서 산 저렴한 와인을 두고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었던 일 등, 늘 나를 happy place로 데려다주는 멋진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4. 책이 '쉽다'고 해서 꼭 '가벼운' 것은 아니다. 와인에 입문하려면 번거롭더라도 꼭! 포도의 품종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래야 라벨만 보고도 대충 와인의 특색을 유추할 수 있고, 자신에게 맞는 와인을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쉽지만 '품종 입문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서 추천한다. 와인의 모든 것을 다룬다고 보긴 어렵지만, 초보가 알아야 할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룬다.
아직 필자에게는 생소한 와인 브랜드나 와이너리 명은 가볍게 넘기며 읽었지만, 와인의 기본기를 탄탄히 갖춘 와인 애호가가 읽더라도 충분히 배울만한 지식들이 가득한 책이다. 탁월한 스토리텔링 실력으로 쉽고 재밌게 풀어두었지만, 그 깊이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와인과 관련된 컨텐츠를 접하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와인에 진심인 애호가들은 와인을 '사람'에 비유한다는 것이다. 와인은 출신지가 있고, 나이가 있고 똑같은 조건에서 만들어져도 어디서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사람과 비슷하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결국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다른 인생을 살 듯, 똑같이 만들어진 와인도 모두 다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가 와인을 마시느냐에 따라서 와인을 즐기는 방식도 달라진다. 누구는 와인을 잘 디캔팅해서 그대로 마실 수도 있고, 누군가는 한 병을 다 마실 심산으로 병나발을 불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떤 낮에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미모사, 샹그리아, 띤또 데 베라노를 만들어 먹을지도 모른다. ( 뜨끔 )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한국의 증류식 소주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며, 어디서 언제 먹던 늘 똑같은 맛을 유지한다. 소주는 비유하자면 공장에서 찍어 나온 클론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리얼 넘버만 다르고 언제든 늘 똑같은 품질을 유지하는, 그런 클론 인간. (?) 하지만 와인은 비교하자면 막걸리와 더 비슷한 술이다. 똑같은 조건 아래에서 만들더라도, 100% 똑같은 맛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와인은 그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하고, 더 알아가고 싶은 술이다. 만약 당신도 그런 와인의 매력에 감겼다면, 와인의 종류부터 역사까지. 다방면을 다룬 이 책만큼 더 훌륭한 입문서는 없을 것이다.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이름만 들으면 뭐가 뭔지 모르겠고 별로 관심도 안 간다. 백화점 와인코너에서 많이 접해보긴 했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그냥 마시면 이건 조금 더 떫고 이건 조금 더 부드럽고.. 이 정도는 알 것 같지만, 돌아서면 뭘 마셨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와인을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상태가 정확히 이랬다.
와인은 그냥 레드와 화이트, 로제 이 정도만 있는 줄 알았고,
자두향이니 흙내음이니 모르겠고 다 똑같은 와인맛이었다.
하지만, 레드 품종계의 황제, 우정의 포도, 포도계의 황후. 이런 닉네임들은 어떤가? 갑자기 머릿속에 거칠고 카리스마 있는 황제와 우아하고 고고한 황후가 떠오르지 않는가? 누군가 당신의 앞에 와인 한 잔을 가져다 두고, 이 와인은 레드 와인계의 황제야,라고 말을 한다면 아마 와인의 깊고 진한 맛, 거친 맛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물론 본인도 아직 와인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냅다 목구멍으로 넘기기 전, 와인의 색과 향을 먼저 맛보고, 품종과 출신지를 살펴보며 어떤 맛이 날지 상상해보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들은 와인을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무기력하던 요즘, 본인이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동네 편의점에만 가도 저렴하고 맛 좋은 와인들을 접할 수 있다. 책에서 거듭 강조하듯, 와인은 이야기 그리고 감성이 중요한 음료이다. 그러니 이 책과 함께, 매주 아니면 매달 새로운 와인을 한 병씩 맛보며 와인의 세계를 탐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책을 아주 즐겁게 완독 한 독자로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을 접한 덕에 앞으로 나에게는 와인과 함께할 나날들이 많아질 것이고, 덕분에 그 시간을 조금 더 잘 음미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와인의 맛과 향, 그리고 스토리에 제대로 취하고 싶다면, 서점에서 마주친 이 책을 집어 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