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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Jul 22. 2021

여름일기, 호시절(好時節)

여름의 정수를 살아내기

바깥은 여름. 에어컨을 오래 틀어 두면 방 안 공기가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 아픈 것 같아, 가능하면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틀어놓는 것만으로 여름을 버티려 노력 중인데.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 바깥공기를 들이면 덥고 습한 바람이 단숨에 밀려 들어와, 정말이지 여름의 정수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여름의 후텁지근함, 숨이 턱 막히는 텁텁함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계절의 관념을 그대로 살아내는 듯.


더운 것도 땀이 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데, 몸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후끈거리고 체온이 조금 오른 듯한 느낌이 들면 괜스레 코로나 감염 증상은 아닌가 걱정부터 앞선다. 혹은 일사병의 증상일지? 차라리 일사병이라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정수를 살아내는 것이 꼭 쾌적하지만은 않더라도, 더울 때 덥고 땀날 때 땀 흘리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몸을 축 늘이고 싶은데. 코로나 걱정 때문에 작정하고 더위를 사는 것도 사치인 것 마냥 느껴진다. 여러모로 야속한 시절이다.


바깥은 폭염이라 맘 편히 나가기도 어렵겠다, 어차피 집에서만 보낼 하루겠다 싶어서 오늘은 논문 작업 동안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처음엔 책, 서류뭉치만 정리하고 분류할 계획이었는데, 정리를 시작하고 나니 방 안 곳곳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논문 쓴다는 핑계로 너무 대충 치우고 살았나 싶은 한편으로, 이 공간에 들어온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니, 적당히 생활감 베인 공간에 그새 익숙해졌구나 싶기도 하다.


먼저 이불을 빨아 널고, 책과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빌려 곧 반납해야 하는 책들을 한데 모아 쌓아두고, 시집은 시집대로, 시집 외 문학 책들과 사회과학 서적들은 그것들대로 정리해 두고, 읽지 않을 책들은 서랍장 속에 넣어두고. 논문 준비한다고 이것저것 섞어 놓은 읽기 자료, 필기한 것들은 주제별로 분류해서 철해 두고. 성물들을 올려둔 보조책상과 책상의 먼지를 닦고, 선반의 덮개 천에 쌓인 먼지는 창밖에 털어 날리고. 그간 모아둔 와인 병은 모조리 분리수거해 버리고, 침대 아래까지 들어내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까지 마치니 드디어 청소 끝.


대강 책이랑 서류들 정리하고 커피 한 잔 하고 쉬려던 것이, 장장 4시간여의 대청소로 이어져, 방 안은 후텁지근하고 온몸에 땀이 뻘뻘 흐른다. 그래도 방 안 곳곳 정돈된 모습을 보니 안정감이 든다. 바깥은 폭염 햇볕은 쨍쨍 여름 무더위가 한창인데, 선풍기 바람 솔솔 불고, 방은 정돈되어 있고, 이불 빨래 널려 있고, 하늘 파랗고 식물들은 푸르니, 퍽 마음에 든다. 여름 더위가 청량하게 담긴 어떤 일본 영화와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청소가 끝나고 정돈된 방

점심 먹고 시작했는데, 벌써 저녁 먹을 시간. 동네 슈퍼에서 소면을 사 와, 어제 봐 둔 레시피를 따라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기로 한다. 백종원 레시피라길래 믿고 그대로 따라서 시도해보았는데 백종원 선생님 입맛이 원래 이렇게 소박한 건지? 달지도 짜지도 않고, 살짝 매콤한 맛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아주 건강한 맛의 비빔국수를 만들어 내었다. 설탕 좋아하는 선생님이 이러실 리가 없다. 백종원 레시피를 사칭한 사이비가 아닐까 싶은데, 다음번엔 기필코 진짜를 찾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비빔국수 황금레시피를 찾기.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고 얼음에 커피를 내리고 나니, 벌써 시간은 여섯 시, 일곱 시를 지나 여덟 시를 향해 가고. 창밖엔 오늘도 노을이 붉다.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네, 이제 운동가야 하는데. 갔다 와서 쓰면 지금의 감이 사라져 있을 것 같아, 부랴부랴 연필 잡고 포스트잇에 적어 남긴다. 이제 운동하러 가기로.


.. 까지 적고 운동을 다녀오니 하루 끝이 가까워졌다. 논문작업 끝나고, 졸업이 머지않고, 이제 현실적인 고민들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지금과 같은 호시절은 없을 것 같아, 사는 대로 느끼는 대로 즐기는 대로 적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오늘 사는 게 좀 즐길 만하다 생각해서 그렇지, 내일은 또 다를지 모른다. 어디 시원한데 풍덩 빠지면 계속 기운이 날 텐데! 아쉬운 대로 여름 노래 틀어놓고 찬물 샤워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하자. 쿨, S.E.S, 유엔, 유피, 인디고, 원투, 플라이투더스카이 반갑고.. 폴킴 수학여행 부럽고!


그런데 이 정도면 여름을 충분히 만끽한 것도 같은데.. 더위는 어서 썩 물러나고 비나 시원하게 내려 주었으면 싶다.



파랗고 붉은, 바깥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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