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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Apr 29. 2023

브로콜리 너마저 <다정한 사월>

이토록 담백한 다정함


공연장으로 내려가던 길, 늘 반겨주는 공연 포스터

일 년이 지나 다시 돌아온 브로콜리 너마저의 <다정한 사월>. 작년 이맘때는 코로나19 제한 조치가 하나씩 해제되던 시기. 모임 인원 제한과 공연 관련 제약들이 이제 막 풀리는 때였던 터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 모이는 것이 무척이나 반갑고 생경했던 시절이었다. 소극장처럼 작은 공연장 안에서 앞으로 옆으로 뒤로 관객들이 옹기종기 바짝 붙어 앉아 숨죽이며 공연을 보았던. 무대 위의 뮤지션은 소리 한 번 질러보자며 “소리 질러~”를 외쳤지만, 다들 어색해 맘껏 지르지 못한 소리들의 자리가 애틋한 마음들로 채워졌던.


코로나19의 여파는 거의 다 가신 듯,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환한 얼굴을 드러낸 사람들이 더 많았던 올해의 <다정한 사월>. 마스크도 벗어던지고 홀가분해져 그런가, 작년 공연 때보다 좀 더 따뜻한 날씨에 옷이 한결 가벼워져 그런가. 앞으로 옆으로 뒤로 조금은 공간의 여유가 생긴 듯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낌은 덜했지만, 애틋한 마음은 한층 더해진 기분이었다. 이 밴드의 노래와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인 관객들이 일구어낸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가 현전 하던 시간. 포근한 브로콜리 공동체랄까. 정말이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공동체가 되겠다.



공연을 기다리며, 장막 위 공연 포스터

5년 전 겨울 <2018년의 우리들> 공연이 끝났을 적이었나, 공연에 다녀와 한껏 행복에 가득해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올렸었는데, 하루 전날 공연을 보고 온 대학교 동기 친구가 한껏 상기되어 나에게 DM을 보내서는, 브로콜리 너마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착한 것 같다는 조금은 귀여운 이야기를 전해준 적이 있었다. 연구자인 친구의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으니 사뭇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그 말들엔 브로콜리 너마저 특유의(?) 사람 사는 냄새가 홀홀 담겨 있어, 나도 그 이야기에 맞아 그렇지 동감하며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더랬다.


그런 기억 때문이려나, <다정한 사월>이란 공연 제목 때문이려나, 올해 공연에는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왠지 다정한 듯 느껴졌다. 왼편에는 다른 일행 분과 떨어져 홀로 앉은 여성분, 오른편에는 여성 두 분 일행이 계셨는데, 오랜 팬이신지 곡마다 특유의 리듬에 손으로 박자를 맞추기도, 미리 준비해 온 응원봉 불을 켜고 흔들기도 하며 무르익는 공연 분위기에 덩달아 흥겨운 모습이었다. 앞쪽엔 남성 네 분의 일행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예전에 팬미팅 비슷한 낭독 행사에 찾아간 적도 있던 유명한 시인이었다. 무대의 동료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듯,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가사에 (당신들은) 좋은 사람이라며 씩씩하게 다정함을 외쳐 주기도 하셨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괜히 서로 정겹고 다정했던 이들. 아마도 착한 사람들.



다정한 문자 통역

그렇지만 작년에도 올해에도 공연장에 가는 기분이 마냥 설레고 들뜬 것만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작년 이맘때에도 요즈음 날들에도 심적으로 힘든 날이 많았던, 누구나 겪을 것이고 남들에게 내보이긴 민망한 것들이라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너무 힘들다는 말 한숨 섞어 뱉어냈던. 그래서 그랬나. 평소엔 즐겨 듣던, 이젠 익숙해져 너무도 평범하게 들어오던 멜로디와 가사들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고. 무언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아 내다가, 대신 숨을 더 크게 쉬어 보다가, 그렇게 무언가 삼키고 뱉길 반복하고 나서야 평소엔 쉬이 가질 수 없는 쉼을 갖는 듯했다. 짧은 러닝 타임 동안 서서히 충전되고 회복되고 치유됨을 느꼈던 영험한 시간. 그런 시간 속에서 다정함기운을 많이 충전해 올 수 있었다.


노래 가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저건 내 얘기 저것도 내 얘기라며 내 것처럼 끌어 오던 날들은 지났지만. 한때 나의 것들이었던 노랫말과 선율들이 지금 지나는 것들로 잠깐 왔다 다시 가니, 언젠가 이 노래들을 들었던 그때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다독이고 응원하며 스쳐간 듯했다. 그런 ‘나’들이 모여 저마다 삶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담아낸 노래들을 함께 들으, 그중 어느 한 단면을 살아내고 있을,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같이 듣는 이들을 마주하 한 때를 함께 보내고 나니, 왠지 알 수 없는 위로가 나를 감싸안는 듯하기도.



앵콜 요청 괜찮아요

앵콜도 끝나고 막이 내리고 난 뒤. 공연 곡 목록엔 없었지만 ‘가능성’이라는 노래의 MR이 공연장을 채웠는데, 아까 앞에 앉았던 시인은 이 노래도 좋은 노래, 좋아하는 노래라 말하며 노랫말을 흥얼거리셨다. “그럴 수도 있었지, 뭐든 할 수 있었고, 뭐든 될 수 있었던”, 이라는 말 뒤엔 어떤 마음이 있을지? 끝끝내 이뤄지지 못한 가능성에 대해, 그저 그런 가능성이 있었노라, 하며 담담하게 괜찮다 하는, 위로한다 말하지 않고 위로를 전하는 말과 마음이려나.


이토록 담백한 다정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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