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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Mar 16. 2016

엘간소, 함께 부르는 노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야영을 시작하다 (with 준현)

슈퍼문 하루 전날.

이번 보름달을 폰세바돈의 철십자가(Cruz de Ferro)에서 보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조금은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오르비고에서 빠스(Paz)를 다시 만났다. 함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걷다가 아스토르가에서는 그녀를 부르고스로 떠나보냈다.

비박을 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 그래봐야 침낭과 비닐, 매트리스, 코펠과 버너 뿐이지만 - 아스토르가를 떠나던 아주 고독한 길목에서 운명처럼 준현군을 만나게 된다. 까미노의 후반부, 그것도 야영과 비박을 마음먹은 그 날, 텐트를 가진 청년과 40대 아저씨(?)의 동행이 시작된 것이다.


[14.8.9 토 / 걸은지 23일째] 보다폰 유심을 꽂은 나의 아이폰에서는 온통 슈퍼문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SNS도 뉴스도 내일 뜬다는 슈퍼문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드디어 비박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뭐 노숙에 가깝겠지만.

텐트를 들고 다니기엔 배낭도 작고 무게도 자신 없다. 이미 가스버너와 코펠, 침낭과 매트리스 등으로 배낭이 포화상태다. 그동안 걸어본 경험에 따르면 비박할 곳은 까미노 곳곳에 널렸다. 성당도 있고 마을의 버스정류장이나 공원 벤치도 괜찮다.

이른 아침 비야반떼를 출발했다. 한시간여 까미노의 본 루트와 만나는 오르비고 다리 직전 바르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만시야에서 알게 된 빠스(Paz)가 들어왔다. 스페인 여인 빠스는 학교 선생님이다. 방학을 이용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단다. 오르비고의 근사한 다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함께 걸었다. 그녀는 쉬운 영어로 우리가 도착할 아스토르가와 까미노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고 한국에 대해 이것 저것 물었다.

빠스는 아스토르가에서 이번 까미노를 끝낸다. 다음 방학 때 나머지 구간을 하겠다고 했다.

아스토르가에 도착해서 그녀를 배웅했다. 원래 아스토르가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르고스나 레온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기차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터미널까지 간 김에 함께 아스토르가의 대성당과 가우디 궁전을 구경했다.

터미널에서는 길 위에서 그녀와 함께 걸은 적이 있다는 프랑스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라이오넬을 만났다. 라이오넬은 이 날 아스토르가의 호텔에 묵는다고 했다.

왼쪽이 아스토르가 대성당, 오른쪽은 A.가우디의 건축물 주교궁

빠스를 떠나보내고 라이오넬과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아스토르가를 떠났다. 슈퍼문이 떠오를 폰세바돈의 철십자가에서 비박을 하려면 오늘은 최대한 폰세바돈 근처 마을까지 이동해야 한다. 부지런히 아스토르가 시내를 빠져나왔다. 어느새 오후 네시. 길 왼편으로 Ermita del Ecce Homo! (Ecce Homo 이 사람이오! : 요한복음 19장5절에 나오는 빌라도의 발언) 라고 쓰인 경당이 하나 나왔다. 경당 입구 간판에는 독일어 등 세계 각국 언어로 쓰여진 "신앙은 건강의 샘" 이라는 글귀가 있다. 물론 한국어로도 쓰여 있다. 그리고 그늘 아래 쉬고 있는 순례자 셋. 둘은 자전거 순례자이고 하나는 도보순례자다.

"부엔 까미노" 인사 후 물을 뜨고 있는데 "한국분 아니세요?" 한다. 선글라스에 모자를 쓴 도보순례자의 입에서 나온 우리말이다. "앗, 한국사람이셨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친구가 바로 남은 순례길의 길동무가 될 20대 청년 준현(이후 준이로 표기)군이다. 이 시간에 길 위에서 도보순례자를 만나기는 힘들다. 대부분 오후 1시 전후로 숙소를 잡고 마을에서 쉬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인 순례자라니.

준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갈 길 바쁜 내가 먼저 길을 나섰다. 무리아스(Murias de Rechivaldo)의 작은 알베르게 앞에서 따라잡혔지만.

Ermita del "Ecce Homo!"

이후 함께 걸으며 슈퍼문 이야기며 그동안 만났던 길동무들 이야기 등을 나누던 중 야영 이야기가 나왔다. 슈퍼문이 뜨는 내일 폰세바돈의 철십자가(Cruz de Ferro)에서 비박을 할 계획이었고 이후로도 유성우가 내린다는 며칠 동안 비박을 하거나 밤순례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준이는 이미 야영을 하며 길을 걸었단다.

엘간소라는 작은 마을. 이미 함께 야영과 비박을 하기로 의기투합 했으니 굳이 알베르게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텐트 한동을 칠 공간만 찾으면 되었다.


저녁식사거리를 사기위해 들른 엘간소의 작은 수퍼마켓 마당.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왔다는 두 커플이 기타를 치며 쉬다가 말을 걸어온다. 이 얘기 저 얘기 서로 잘 안되는 소통을 하던 중 자연스럽게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다. 하모니카를 빌려 우리나라에도 '아 목동아' 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일랜드 민요 "Danny Boy"를 연주해 주니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흥이 넘친 그들은 춤까지 추기 시작했다. 음악은 세계공통어라는 말이 실감났다. 함께 노래하던 독일인 부부는 "소나무(Der Tannenbaum)" 가 자기네 나라 민요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 날 저녁, 아일랜드와 독일 그리고 한국에서 온 여섯명의 노래와 춤은 무척 아름답고 즐거웠다. 약간의 취기가 분위기를 띄워 주었음은 물론이고.

마을을 조금 벗어난 곳에 작은 공원이 하나 보였다. 스페인의 밤은 열시가 넘어서야 어두워졌다. 모닥불을 피우고 텐트를 친 후 와인에 취해 까미노에서의 너무도 행복했던 첫 야영을 했다.

[전체일정] http://brunch.co.kr/@by1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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