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세바돈의 춥고 습한, 그러나 너무도 경건했던 밤
산티아고 순례길의 프랑스길.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여 km 남짓. 그 길을 걸으며 순례자들은 피레네의 영웅과 팜플로나의 헤밍웨이, 뻬르돈고개의 순례자상, 해바라기, 이라체의 포도주샘, 산토도밍고의 수탉, 부르고스의 요새, 메세타, 레온의 대성당과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저마다 고향을 떠나올 때 자기의 번뇌를 상징하는 돌을 하나씩 들고 온다.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그 돌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걷고 또 걸어 폰세바돈의 산 위에 있는 까미노의 철십자가 아래에서 자신만의 의식을 치르며 그 돌을 드디어 내려놓게 된다.
[8.10 일요일 / 걸은지 24일째] 역시 여행의 백미는 야영이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 술잔을 기울이다 좁지만 아늑한 텐트에서 부대끼며 잠드는 그 멋이란. 지구 반대편 스페인의 낯선 시골마을에서의 야영은 더욱 흥분되는 일이다.
우리가 야영을 한 공원은 순례길 바로 곁이라서 아침 일찍 출발한 순례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그리고 그 순례자들 속에 레온에서 함께 했던 보라가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보라 역시 가끔씩 야영을 하며 순례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보라도 오늘 밤 떠오르는 보름달이 보기 드문 슈퍼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까미노의 철십자가에서 슈퍼문을 볼 예정이라고 하자 덩달아 설레어 했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나섰을 때 먹구름이 하늘을 채우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라는 작은 마을에서 요기를 한 뒤 폰세바돈으로 향하는 숲길에서 비구름을 만났다. 순례길을 걸은 뒤 처음 비를 맞으며 걷게 됐다. 폰세바돈 직전의 쉼터에는 다양한 순례자들의 메시지가 가득했다. 한국인 순례자들의 것들도 꽤 있다.
샘터에서 낮잠까지 한 잠 자고 나니 폰세바돈에 도착할 때는 벌써 오후 다섯시가 넘어 있었다. 빗 속에 온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산 위의 마을 폰세바돈은 이미 구름 속에 갇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비도 피할 겸 들어선 몬테 이라고 알베르게(Albergue Monte Irago). 꽤 많은 순례자들이 홀에 모여 있었는데 비를 쫄딱 맞은 우리가 들어서자 갑자기 환호성을 지른다. 뜻밖의 환영을 받았지만 우리는 보름달, 그것도 슈퍼문이 뜬다는 이 날 밤 순례자들이 비밀스럽게 자신만의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철십자가 크루스 더 페로에 오를 생각이므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하지만 막상 거세진 비와 추운 날씨 덕분에 우리는 얼마 안 가 나오는 옛 성당에 지어진 알베르게로 들어서고 말았다. 폰세바돈 초입에 우리를 환영 해 주었던 '몬테 이라고' 알베르게와 이 곳 '하느님의 작은 집(?) Albergue Parroquial Domus Dei' 은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기부제.
옛 성당 한쪽에 겨우 매트리스만 깔린 자리를 잡고, 공동으로 식사도 했지만 머리 속에는 계속해서 오늘 뜬다는 슈퍼문 생각만 났다. 결국 소등시간 즈음인 밤 11시경 길을 나서기로 했다. 준이는 함께 하기로 했지만 보라는 악천후 때문에 알베르게에 남게 됐다.
그리고 오른 해발 1,500미터의 철십자가탑 Cruz de Ferro.
8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순례길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장소. 순례자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자기 고향에서 돌을 하나씩 가지고 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바로 여기 폰세바돈의 철십자가 아래에 그 돌을 버린다. 번뇌와 함께. 또 미련과 함께. 여기서 자신을 비워 버리고 완전히 다른 내가 되기로 결심을 하는 것이다.
철십자가탑 아래 작은 메시지를 하나 남긴 후 한참동안 기도를 했다. 무척 어둡고, 춥고 습한 밤이었지만 기도하는 동안 전혀 춥지 않았고 가슴으로 무언가 뜨겁게 차올랐다.
그리고 때맞춰 그 해 최고의 우주쇼라는 슈퍼문이 아스토르가 방향의 하늘 위로 떠올라 주었다. 먹구름 속에서 잠시 나타나 주었지만.
추운 날씨와 빗속에서 야영을 하기 보다 밤새 걷기로 했다. 철십자가에서 오랫동안 각자의 시간을 보낸 뒤라 시간은 이미 새벽 한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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