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의 병목지역, 사리아를 거쳐 포르토마린까지
포르토마린, 아름답지만 아픈 과거를 가진 마을. 댐을 짓기 위해 미뇨강을 틀어막으면서 수몰된 마을이다. 지금의 포르토마린은 저수지 아래에 수몰되어버린 옛 마을의 건물들을 옮겨 새로 조성된 마을이다. 광장에 뜬금없이 혼자 우뚝 선 산 후안 성당 역시 벽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 순서대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성당 외벽 곳곳에는 아직도 벽돌에 적힌 숫자들이 보인다.
수몰지구의 건물들을 고스란히 옮겨와 마을을 조성한 것은 작은 건물 하나라도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부럽지 않은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함께 걷지만 혼자이고, 혼자 걷지만 누군가와 함께다.
[8.16 토요일 / 걸은지 30일째] 가끔 길 위에서 혼자가 되면 나는 내 곁에 성 야고보께서 함께 걷고 있다고 위안을 삼으며 걷곤 했다. 때로는 성모마리아이기도 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함께 걷지만 혼자이고, 혼자 걷지만 함께라는 말의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사모스의 수도원을 나서는데 벌써 학생 단체 순례객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스페인의 학생 등 시간이 많지 않고 순례증서가 필요한 사람들의 경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100킬로미터를 넘어 처음 나타나는 도시 사리아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증서는 대학 성적에도 가산점이 주어지고 취업에도 도움이 된다니 일종의 라이센스인 것이다.
사모스에서 사리아를 향해 가는 길. 단체로 온 학생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걷다가 어느 순간 우리는 간식을 먹기 위해 잠시 길을 벗어났다. 순례길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이었다. 자리를 잡고 물을 꺼내드는 순간, 정적을 깨고 갑자기 들려온 것은 분명 총소리였다.
누군가 사냥을 하는 걸까?
그 때 또다시 몇발의 총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꽤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고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며 낮은 담벼락에 기대었다. 이미 간식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총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표적을 정한 뒤 한방씩 쏘고 있는 어느 미치광이가 우리의 언덕 위쪽에서 순례길을 노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여기서 죽게 되면 순례길에 무덤을 만들어 줄까?
혹시 스페인의 분리주의자들과 왕당파간에 내전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무차별 총격 테러?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조심해서 길을 나섰다. 총소리의 근원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곧 사리아에 도착했다.
사리아의 어느 공원에서 샌드위치(보까디요 bocadillo)를 만들어 먹었다. 바게트 사이에 참치와 양상추 등으로 만든 샐러드를 넣어 먹었는데 가장 맛있게 먹었던 보까디요였다. 사리아에서부터는 순례길 중간 병목지점이 밀리기도 할만큼 순례자들이 크게 늘어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여 순례증명서를 받으려는 스페인 사람들이 -성적,취업 등 각종 이유로 증명서를 받으려고 한다- 100킬로미터 이후 가장 가까운 소도시 사리아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순례증명서는 도보로 100km 이상을 걸으면 받을 수 있다.
시내에서 길을 잘 못 드는 바람에 외곽으로 해서 사리아를 바로 빠져나오고 말았다. 멀리서 언덕 아래로 보이는 수도원을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사리아를 빠져나오는 바람에 예상외로 한가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K.100 표지를 만났다. 100km만 더 걸으면 별들의 벌판 산티아고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접어든 뒤로 길이 무척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이유는 소똥 때문이었다. 피레네나 시골 마을들을 지날 때 간혹 그런 모습들이 있었지만 갈리시아 지방의 시골 마을들은 유독 심했던 걸로 기억된다. 어쩌면 갑자기 순례길이 복잡해진데 대한 불만에서 온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K.100 표지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그 중에는 간절한 마음도 있었고 OO♥XX 같은 연인들의 다짐도 있었다. 그저 그리운 누군가의 이름을 적은 이도 있고, 자기만의 사인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K.100이 아닌 K.99 표지에 이름을 적었다. 이제 곧 포르토마린이다.
물의 도시 포르토마린으로 들어서려면 K.90 표지를 지나 포르토마린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 다리가 좀 후덜덜하다. 루고(Lugo) 북쪽에서 발원되어 자그마치 포르투갈을 지나 대서양으로 쏟아져 내리는 미뇨(miño)강이 포르토마린에서부터는 저수지가 되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리 자체도 워낙 높이 설치되어 있어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 무서워 하기도 했다. 이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포르토마린을 비롯한 몇 개의 마을들이 수몰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수몰된 마을의 역사 깊은 건물들과 성당까지도 일일이 분해하여 고지대에 새로 조성한 마을로 옮겨놨다. 그것이 1960년대였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는 보존가치가 높은 시골의 초가집과 기와집들을 부수고 똑같은 집들로 시골을 조성하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다. 마냥 부러운 저들의 문화의식.
포르토마린의 공원에서 야영을 했는데 자전거로 순례중인 스페인 청년들도 함께 했다.
스페인에서는 잔디로 조성된 공원에서 야영을 할 때 자정이 지나면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물을 쏘아 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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