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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Mar 28. 2016

살세다에서 만난 태극기

까사베르데 주인장의 한국인 대접하는 법

유럽의 변방 스페인의 시골마을을 걷다가 우연히 들른 바에서 태극기를 발견하면 기분이 어떨까?

그 바의 주인이 자그마치 "오메 한국인이 왔네, 한국인은 특별대우 해줄거야!" 라고 말하면?

빈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냉동실에 시원하게 묵혀놓은 칵테일을 가져와서 자기랑 한잔 하자고 들이대면?

더구나 그녀가 칵테일을 따라준 잔이 한국의 소주잔이라면?

순례길의 마지막 하루를 걸으며 잔뜩 우울해져 있는 나에게 진짜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앞서 이 바에 들렀던 어느 한국인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최고로 만들어 놓았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야 말로 민간외교사절 아닐까?


[8.19 화요일 / 걸은지 33일째] 이제 걷는것이 하루의 전부가 되어버렸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같은 잡념들이 전혀 안 떠오르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아침에 눈 뜨면 여기가 스페인이구나 하는 생각도 이제 들지 않는데. 벌써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 길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급 우울해졌다. 다시 번잡하고 먹고 살 걱정을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물론 아직 일주일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난 밤 아르수아를 지나 도로공사가 진행되려 하는 어느 들판에서 야영을 했다. 아스토르가 이후 야영과 비박을 함께 해 왔던 준현군과 함께였다. 야영의 막바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길을 마냥 바라보면서 그동안 걸어왔던 길의 추억들이 스쳐갔다. 유성도 몇 개 떨어져 내렸다. 와인의 취기만으로 따뜻해졌던 건 아니다. 밤새 태워도 남을 만큼의 나무토막과 죽은 나무가지들이 주변에 널려있었기에 모닥불을 잔뜩 피울 수 있었다. 준현군도 나도 별 말 없이 자기의 길을 되돌아 보며 와인만 들이켰다.

아침이 되었고 일찍 나선 순례자들이 손을 흔들어 주며 "부엔 까미노!" "올라!" 하고 외치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하루종일 그저 우울했다. 이것이 바로 순례길 증후군일까?

맘이 안좋으니 몸도 빨리 지쳐갔다. 사리아쯤에서 출발했을 젊은 순례자들이 휙휙 우리를 앞서가고, 지친 몸을 쉬어가기 위해 살세다의 바르 까사베르데(A Casa Verde)에 들어섰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났다.

순례자들이 기증한 티셔츠들이 가득 매달려 있는 홀,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 놓은 태극기. 콜라 한잔을 시켰는데 그녀는 말했다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서비스가 있지!"

냉장고에서 꺼내온 것은 향긋한 커피맛이 가득하지만 독한 보드카가 섞여 있는 칵테일 블랙 러시안. 그리고 그녀가 가져온 술잔 두개는 한국의 소주잔이었다.

"옛날에 한국에서 온 순례자가 선물로 주고 간거야" 소주잔에 차가운 커피맛 칵테일을 따르더니 건배까지 제의해 왔다. 연거푸 두잔, 은근히 취기가 올라오니 그녀의 배려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살세다에 위치한 바르 까사베르데(Casa Verde)에서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상태로 걷기 시작했다. 내일이 벌써 도착하는 날이라니. 길도 하늘도 나무 한그루까지도 갑자기 소중하게 다가왔다.

순례자들의 죽음을 기리는 명패들과 풍차모형 홍보탑과 작은 마을의 성당들, 그리고 샘과 쉼터들을 지났다. 할머니들과 예쁜 아가씨들과 멋진 이탈리아노들과 반가운 한국인들이 뒤섞여 함께 걷는 길.

오 페드루소(O Pedrouzo)가 다가올 수록 하늘에는 비행기의 궤적이 더욱 진하고, 수직에 가까워진다. 산티아고 공항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신호다.

산타 이레네 길가에 만들어진 휴식처(샘) 곳곳에 수많은 낙서들이 보였다. 우리말 낙서들도 많이 보인다. 순례길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글도 많이 보인다. 내일이면 산티아고 도착이니 그럴만도 하다.

거기서 다시 숲길을 지나 도로를 가로지르는 굴다리를 통과하면 Hotel Parrillada Amenal 이라는 간판을 단 호텔 앞이다. 샐러드 등을 먹으며 저녁시간을 여기서 보냈다.

오 페드루소를 지나 산티아고 공항을 둘러 가다보면 주변이 황량하기 그지없다. 공항 주변의 풍경은 늘 그랬던 것 같다. 공항 바로 곁을 지나다보니 이착륙 하는 비행기들의 항공사 이름까지도 볼 수 있었다. 

순례길에는 아름다운 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포도밭과 해바라기밭 뿐인 사막같은 곳도 무수히 지나오지 않았던가. 무수히 땅에 떨어진 소똥도 피해 다니지 않았던가. 이제 그 모든 길들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몬테 도 고소(Monte do Gozo)에 도착했다. 이 곳은 산티아고 입성 전야를 보내는 수많은 순례자들을 위해 초대형 알베르게가 편의시설들과 함께 지어졌다. 그리고 그 언덕 꼭대기에는 교황 요한바오로2세 성인의 산티아고 방문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다.

이 날은 준현군과 야영하지 않고 비박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광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목장에 있는 호수 옆에 텐트를 치고 마지막 캠프를 하게 됐다. 그리고 두사람 모두 아주 편안한 밤을 보냈다.

산티아고순례길의 마지막날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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