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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선 Jan 21. 2024

등산은 왜 할까

기분이 영 별로인 날이 있다. 아침 햇살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작은 진동마저 거슬렸던 걸 보면 분명 아침부터 징조가 있었을 터인데, 느지막이 그와의 전화를 끊으며 비로소 내 마음을 알았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 마음을 따라가 보니 요 며칠 아픈 발을 이끌고 올레길을 뚜벅인 이유도 이해가 가는 듯했다.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건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사람들에 한동안 넘치는 도파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찾아온, 온전한 나의 시간이었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지. 방 안에 주황빛이 가득 들어서자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벽에 비추는 그림자에 포즈를 취하거나 발가락을 높이 치켜세우며 홀로 킥킥댔다. 개운하다. 손을 쭉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는 늘 스피커가, 다른 한 손에는 정리되지 않은 플레이 리스트가 있으니 자유로운 아침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어제 본 영화 중경삼림의 OST를 재생 목록에 추가하며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뻣뻣한 골반을 튕겼다. 보통의 날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기분에 따라 노래를 틀고, 누구도 보지 못하는 춤을 선보이고.


겨울 제주의 동쪽은 해가 잘 숨는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겨울의 이곳은 추천하지 않으리. 해가 뜨는 날이 그만큼 소중하기에 그런 날은 어김없이 집을 나서곤 했다. 그날은 어찌나 날씨가 맑던지 눈이 펑펑 와 울상인 서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정도였다. 나는 선물을 몰아 받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올레길 한 코스를, 그다음 날은 반대편의 한 코스를 걸었다. 날씨 요정을 넘어 날씨 산타가 왔구나. 어디를 가든 해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것들이 곁을 내주니, 그 속에 흠뻑 빠져들 만한 노래만 있다면 마침내 그 인상은 오래도록 간직될 것이라는 기대가 들었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 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어차피 내려올 걸 알면서도
뭐 하러 그렇게 높이 오를까


그런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오늘이었다. 구름 틈에 낀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 하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모양새에 맞춰 내 눈앞도 빨개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몇 시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 잠에서 깬 나는 적당한 노래를 틀려다 이내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최근 재생 목록을 무작위로 재생했다. 찌뿌둥한 기분 역시 날씨 탓인가. 대수롭지 않게 스피커를 챙겨 화장실로 향했다. 캘리포니아 드림에 맞춰 또다시 왕페이의 몸짓을 흉내 내려고 했지만, 별다른 흥이 나지 않아 반짝거리는 전원 버튼을 무심히 눌러 껐다. 투두둑 투두둑 백색 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지루함을 이기며 샤워를 끝냈다. 그 뒤로는 오로지 기분 전환을 목적으로 했지만, 무엇 하나 뚜렷이 기억에 남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여전히 심심한 기분을 맥주로 달래던 찰나, 그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뭐 했어?”

“똑같았어. 아, 사실은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


술은 또 왜 그리들 마시는 걸까
뭐 하러 몸 버려 가면서 노나
어차피 깨버릴 걸 알면서도
뭐 하러 그렇게 취하려 들까


부족한 재료를 정리해 장을 봐왔고, 그 덕에 먹고 싶었던 샥슈카도 해 먹었어. 그리고 김이 폴폴 나는 채소들이 식기만을 기다리다 그것들을 갈아 주스로 만들었지. 길을 걷다 가만히 돌에 앉아 오리가 이동하는 걸 지켜보기도 했고, 구름 틈을 뚫고 나온 노란 태양이 빨갛게 바뀌는 걸 지켜보며 하루를 마무리했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곳곳에 조명을 켜두고는 그 아래 소파에 앉아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있는데, 그런데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아. 마침표 속 감춰둔 이야기를 끊긴 수화기 너머로 줄줄 읊었다. 태양보다 진한 빛으로 둘러싸인 방에 앉아 한참 눈을 굴리며 마음을 되짚는 사이, 작게 진동하는 스피커에서는 대충 음을 붙인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마음을 대신하는 가사가 들려왔다.


내가 지금 혼자라 느끼는 건
애초에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그냥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다시 외로울 바에야
애초에 곁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


풉, 너는 외로움이었구나. 나를 하루 종일 괴롭힌 이 감정이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현재를 불만족스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숨을 뱉었다. 좋지 않던 기분도 어느새 흩어지는 목소리에 올라타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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