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소공녀가 어울려.”
대뜸 던져진 그의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연애 초부터 이상형과 가깝다는 말을 내세워 이따금 내 행동과 외모를 누군가에게 빗대어 말하는 그였다. 환상 속의 연애를 기대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고, 때때로 그 환상 속 여인이 나보다 못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나쁜 뜻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몇 번이고 멋쩍은 웃음으로 그의 말을 넘겼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완전히 꽂힌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였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소공녀가 뭐냐고 묻는 나의 말에 그는 여전히 흥분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돈이 없어도 담배, 위스키, 사랑은 포기하지 못하는 여자란다. 그다지 유쾌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잘 먹지 않는데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그가 심적으로 힘들었을 시절에 감명 깊게 본 영화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로서 미소를 해석할 수는 있었다. 나는 별안간 그의 핸드폰에 소공녀로 저장되었고, 헤어지기 전까지 그의 소공녀였다.
우리는 그날 나란히 누워 소공녀를 보았다. 광화문시네마라고 적힌 화면이 필름처럼 넘어가는 사이, 나는 핸드폰을 켜 소공녀를 검색했다. Microhabitat라는 작은 영어가 옆에 붙은 그 단어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성실히 살아가는 소녀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한 작가가 지은 소설에서 비롯되었다나. 그 설명을 보니 영화의 내용이 어렴풋이 예상되었다. 화면 속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나를 그가 툭툭 쳤다. “영화 시작한다!”
주인공 미소는 내가 상상한 인물이었다. 일당 4만 5천 원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오르는 물가에 쓸 비용은 늘어만 간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가장 먼저 집을 포기하고 친구의 집을 떠돌며 생활하게 된다. 나는 미소의 방문을 은근히 불편해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공감했다. 그리고 미소를 한심하게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나의 공통점을 찾고 싶어 했는데, 그건 바로 사랑이었다. 섹스는 봄에 하자는 남자 친구의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피를 뽑아서 데이트를 해도 함께 있으니까 그걸로 좋고, 돈 때문에 몇 년간 해외 생활을 해야 하는 남자 친구의 손에 꿈을 포기하지 말라며 선물을 쥐여주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꼭 나와 닮았다.
나는 그와 연애를 시작하며 동시에 동거도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살 옥탑방을 구했다. 그곳은 말이 옥탑방이지 지붕에 얹어진 컨테이너였다. 전에 살던 사람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운 건지 벽은 온통 담배 자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의 옛 연인은 옥탑방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나는 그의 로망을 이뤄주고 싶었다. 흥분에 차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보면 뭐든 다 해주고 싶었달까. 당시 휴학을 했던 나는 그 기간에 한 거라고는 PB-1을 뿌려 찌든 때를 며칠 동안 닦아내고, 연탄을 옮기다 볼을 쓱 비벼 까맣게 만들고, 훗날 원수가 되는 집주인 할머니의 푸념을 듣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겨울에 이사한 우리는 새어 들어오는 웃풍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함께 있기에 충분히 행복했다.
그와 함께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지는 못했다. 그는 미소의 남자 친구 한솔이 그녀를 떠나듯 나를 떠나 버렸다. 홀로 옥탑에 남을 자신이 없던 나는 미소가 떠돌 듯 방황했다. 지방에 머물다가 서울에 갈 때면 간간이 친구의 집에 머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오랜만에 본 그들이지만 반가움보다도 앞서는 창피함에 한없이 의기소침해졌다. 집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미소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런 와중에도 담담히 발걸음을 옮겼었지. 나는 한동안 혼자라는 것에 적응해야 했다. 모든 기준이 ‘함께’하는 것에 맞춰져 있던 탓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굳이 멀리하던 소공녀를 최근에 다시 보았다. 그가 나를 소공녀라고 부른 이유에 대해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소공녀를 영영 내게서 떠나보내고 싶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가 무르익을수록 불안해지는 내 마음과 달리 미소의 표정은 평온했다. 처량한 처지에 간신히 살아가는 줄만 알았던 그녀의 얼굴은 늘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잊은 채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표정을 읽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한 걸까. 아니면 그때의 그가 내게서 이런 모습을 봤던 걸까. 소공녀라는 말이 마침내 썩 나쁘지 않게 들리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