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과 여유 있는 시간
토요일 아침은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기분이 좋은 시간이다. 오늘, 내일, 이틀 동안 회사를 안 가도 되니까.
내게는 노는 날이지만 와이프는 학원으로 일을 하러 나간다. 그래서 항상 내가 차로 데려다준다. 10시까지 출근이라서 9시 20분에는 출발해야 한다. 즉, 대략 8시 반까지 늦잠을 자도 된다.
어젯밤, 새로 산 소설책을 읽느라 3시에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다가, 와이프가 부산대는 소리에 어설프게 잠이 깼다. 창밖으로 산비둘기가 4/4박자로 우는 소리가 들렸다. TV에는 예능 프로가 틀어져 있었고 연예인들이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잠결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 결국 완전히 깨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도 안되었다. 평소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각이다. 잠이 부족한 듯했지만 일어나기로 했다. 기분 좋은 토요일 아침. 9시 20분까지 두어 시간의 여유를 즐기리라.
요즘은 매일 아침 와이프에게 커피를 타 준다. 이케아에서 원두커피세트를 사고 나서부터 하게 된 일이다. 내가 깬 것을 눈치챈 와이프는 ‘커피~~’부터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원두를 갈아 깔때기에 넣었다.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부었다. 구수한 향과 함께 커피 물이 똑 똑 떨어졌다. 여러 차례에 걸쳐 조심스럽게 물을 더 부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머그컵에 1/3쯤 따랐다. 전자레인지에 1분을 돌렸다. 따뜻해진 우유에 거품기로 거품을 내었다. 1,900원 밖에 안 하지만 이케아에서 산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거품이 난 우유에 연유를 넣었다. 와이프가 달게 해 달라고 주문하여, 평소보다 반 숟갈을 더 넣었다.
내려진 커피를 하얀 우유 거품에 따랐다. 가운데로만 따라서 작고 동그란 갈색 커피 자국을 만들었다. 그 자국에 숟가락을 넣었다. 동그란 자국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숟가락에 스냅을 주었다. 커피가 벽을 따라 살짝살짝 넘치며 갈색 자국을 남겼다. 한 바퀴 돌아가니 링 모양의 자국이 만들어졌다. 머그컵 안에 갈색 링 안에 하얀 거품 안에 갈색 원. 동심원 네 개. 나만의 시그니처이다. 다 만들어진 커피를 와이프에게 대령했다.
나는 커피를 잘 마시지도 않거니와, 맛으로 먹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만든 커피가 맛있는지는 잘 모른다. 와이프가 항상 맛있다고 하니 그런 줄 알 뿐이다. 오늘도 와이프는 내 커피가 맛있다고 했다. 진짜 맛있거나 계속 커피를 타게 하려는 거짓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인지 알 것 같지만,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다.
내 할 일은 다 끝났다. 이제 토요일 아침의 한가한 여유를 즐길 차례이다. 여유를 즐기는 데는 따뜻한 차 한잔이 제격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과일차도 사놓았다. 티백 형태로 8 종류가 들어 있다. 어떤 맛을 먹을까 고르는 것도 행복한 고민이다.
빈 속에 차를 마시면 배가 아플 테니, 먼저 간단하게라도 아침을 먹기로 했다. 와이프는 원래 아침을 안 먹는다. 아이들은 10시나 되어야 일어날 것이다. 내 것만 준비하면 된다. 최대한 간단하게 먹고 싶었다. 그래서 냉동실에 얼려둔 찬밥을 끓여 먹기로 했다.
물을 끓이려고 냄비를 찾는데, 보이질 않는다. 싱크대를 보니 한가득 설거지 가운데에 찾던 냄비가 있다. 설거지부터 해야겠다.
식기세척기를 열어보니 여기도 한가득이다. 여기부터 정리해야겠다. 안에 있는 식기들을 꺼내어 선반에 정리했다. 그리고 싱크대에 있는 식기를 세척기에 하나씩 넣었다. 건더기가 묻어 있는 식기는 물을 틀고 애벌로 씻었다.
그런데, 싱크대에 물이 안 내려간다. 와이프 말로는 어제도 그랬단다. 어제는 홈쇼핑에서 산 하수구 뚫는 가루를 넣어서 괜찮아졌었단다. 그런데 오늘 다시 말썽인 것이다.
나, 공대 나온 남자다. 화학적으로 해결이 안 되면 물리적으로 해결한다. 예전에 세면대가 막혔을 때는 빨대를 쑤셔서 뚫었었다. 이번에도 빨대를 쑤셔보았는데 파이프가 ㄱ자로 꺾였는지 아예 들어가질 않는다.
싱크대 아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1)은 싱크대 배수구이다. (2)는 물 넘침을 방지하기 위해 싱크대 옆구리에 있는 배수구이다. (3)은 두 배수구를 연결하는 T자형 파이프이다. (4)는 식기세척기 배수구이다. 식기세척기는 잘 되는 것으로 보아 (3) 부분이 문제일 것이다. 문제 분석이 끝났다. (1)과 (2)의 플라스틱 나사를 풀어서 분해한 다음 (3)의 안을 뚫어주면 될 것이다. 작업 계획이 수립 되었다.
머릿속으로 작업 시뮬레이션을 돌리다가 한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지금 파이프를 풀면 싱크대에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대 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무언가 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아래에 고여 두어야 한다. 첫 번째로 냄비가 떠올랐다. 하지만 썩은 물을 담았던 냄비로 다시 요리를 할 수는 없다.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와이프에게 못쓰는 대야 있냐고 물어보니, 예전에 내가 버리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아, 기억났다.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유화 물감으로 떡칠이 되어 있던 대야. 몇 년 동안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걸 버렸었지. 드디어 필요한 순간이 왔는데,,, 없다... 우리 조상님들은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하셨는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을 만들어 두셨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말도 만드셨다. 한참 집안을 뒤져 당장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플라스틱 통을 찾아냈다. 통의 부피는 싱크대에 고여 있는 물보다 커 보였다. 물이 넘칠 일은 없을 것이다. 파이프 아래 잘 고여 두었다.
파이프의 나사를 풀었다. 채 분리되기도 전에 썩은 물이 새 나왔다. 파이프를 빼자마자 (1)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으로 예상했던 그대로다. 재빨리 손바닥으로 출구를 막았다. 고 짧은 사이 물은 이미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손 아래쪽을 살짝 벌려서 물이 통으로 떨어지도록 했다. 지독한 하수구 냄새가 났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통을 2/3쯤 채우고 물이 멈추었다.
(3)의 안에는 사과껍질, 양파 같은 큰 건더기가 있었다. 그 사이를 검고 끈적한 무언가가 메우고 있었다.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손가락으로 후벼 파 꺼냈다. 냄새가 아까보다 더 지독했다. 건더기와 끈적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튀어 있던 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파이프를 다시 조립했다. 물을 틀어보니 막힘 없이 잘 내려갔다.
미션 컴플리트. 문제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었고, 작업 계획을 수립했고, 예상되는 문제에 대처 방안까지 마련한 결과,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약간의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금방 수습했다. 문제점은 외과 수술처럼 깨끗이 제거되었다. 역시 하수구는 물리적으로 뚫었을 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 사이다 먹고 트림할 때처럼 후련하다.
아참... 아침을 먹으려고 했었지. 손에는 아직 아까의 끔찍한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이 상태로 아침을 먹을 수는 없다.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손톱 사이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샴푸질을 두 번 했다. 물기를 닦고 거실로 나왔다.
아참... 식기 세척기를 돌리려고 했었지. 싱크대에 남아 있던 식기를 마저 세척기에 넣었다. 문을 닫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제 밥을 먹기 위한 사전 준비는 모두 끝났다. 냉동실에 있던 밥 한 그릇을 꺼내 냄비에 넣었다. 밥이 잠길만큼 물을 붓고 5분 정도 끓였다. 불을 끄고 냄비를 식탁에 놓았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 몇 개를 꺼냈다. 밥을 먹으려는데, 너무 뜨거웠다. 식을 때까지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뭔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음식 창고 문 손잡이를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대신에 뚝 떨어져 나왔다. 헐. 이게 무슨 일? 자세히 살펴보니, 경첩의 나사못이 헐거워져 있었다. 집이 오래되다 보니 하나둘씩 여기저기 고장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나, 공대 나온 남자다. 이럴 때는 경첩을 옆으로 옮겨 달면 된다. 드릴질 몇 번이면 끝나는 일이다. 이정도는 껌이다. 드릴로 나사를 풀어서 경첩을 완전히 분리했다. 경첩의 위치를 조금 옮기고 스카치테이프로 문틀에 임시로 고정시켰다. 드릴로 나사를 박았다.
드릴은 이케아에서 산 것 중에서 두번째로 사랑하는 물건이다. 예전에는 나사 하나 박으려면 드라이버를 돌리며 땀 깨나 흘려야 했다. 지금은 드릴질을 할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 내 인생은 드릴을 사오기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드릴은 남자의 공구다.
황홀한 순간은 나사 두 개를 박고 끝났다. 이제 문만 달면 된다. 종이를 접어 문 아래에 받쳐서 고정시켰다. 나사를 박으려고 하는데... 이런. 경첩 구멍이 나사못 머리보다 크다. 와셔가 있었는데 나사가 빠지면서 떨어진 것이다.
창고 안은 각종 박스에 비닐봉지로 난장판이었다. 눈곱만한 와셔는 그 난장판의 어디엔가에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 내는 것은 덤불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문에 달 나사 네 개중에 세 개는 예전부터 빠져 있었다. 세 나사에 있던 와셔는 이미 몇 년 전에 증발했을 것이다. 경첩을 구멍 작은 것으로 새로 사던가, 와셔를 새로 사던가 해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창고 문 미션은 중단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 때문이었다. 드릴질의 쾌감에 눈이 멀어 시뮬레이션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수한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아참... 밥을 먹고 있었지. 성과 없는 씨름을 하는 동안 밥은 이미 먹을 만큼 식어 있었다. 아침부터 많은 일을 했더니 밥맛이 꿀맛이었다. 바닥까지 싹싹 비웠다. 먹은 식기는 싱크대에 놓고 반찬통은 냉장고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제 차를 마시기 위한 사전 작업은 모두 끝냈다. 드디어 차를 한 잔 마셔 볼까? 무슨 차를 마실까 고르며 시계를 보니 9시 15분이다. 이런... 5분 뒤에 출발해야 한다. 와이프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닦고 나오니 9시 20분이 되었다. 와이프와 함께 집을 나섰다. 머릿속에 있던 차는 결국 입속에 넣지 못했다.
일주일 중에서 가장 기분 좋은 시간이 이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 차 한잔의 여유는 부릴 수 없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일어나자마자 차부터 마셔야겠다. 빈 속에 배가 아프던지 말던지는 그다음에 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