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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Nov 14. 2021

산티아고 순례길, 레온~산마틴, 26.43km

21. Day18, 순례길에서 내가 나에게 했던 3가지 약속

내 속에서 속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나는 내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3가지 약속을 했었다.

 

 1. 꼭 배낭을 메고, 두 발로 끝까지 완주하기

 2. 매일매일 일기를 써서 기록에 남기기

 3. 책을 한 권 꼭 읽기


 조금이라도 젊을 때, 꼭 무거운 배낭을 메고 포기하지 않고 걷고자 했고, 매일매일 하루 일과를 일기로 쓰기로 했다. 덕분에 3년이나 지났지만 그때 썼던 일기를 보며 알음알음 기억을 더듬어 적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이 책 완독 하기였다. 당시 내가 가지고 간 책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을 가지고 간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프리젠터 선생님께서 인생 책이라고 소개해주셨고, 나에 대해 돌아보고 알아가는 순례길에서 성장 소설로 가장 유명한 책인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오늘 아침은 호스피탈로 가 6시에 강제로 깨웠다. 강제로 깨우는 알베르게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항상 새벽에만 출발했기 때문에, 일부러 늦게 일어나서 혼자 출발하려 했는데, 강제로 깨우는 바람에 사람들과 똑같이 출발하였다. 아침에 연 카페가 없어 레온을 빠져나가고 읽기로 했다. 레온을 빠져나가는 길은 꼬불꼬불했다. 내가 보기엔 훨씬 더 빨리 나갈 수 있어 보였는데, 노란 화살표는 마치 레온 골목을 구석구석 보고 가라고 일부러 이렇게 길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같이 걸었던 친구들과 오늘 잘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카페로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펼쳤다. 소설은 주인공이 어릴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가 '데미안'이라는 현자를 만나 성장해 나가는 모습, 자기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그린 소설이다. 주로 내면의 생각이 글로 많이 써져 있는데, 소름 돋을 정도로 생각할 것이 많은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순례길이라는 상징적인 곳에 이 책을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읽다 보니 어느덧 12시가 다 되었다. 카페를 나와 대낮에 혼자 걸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소설 속 내용이 현재 나의 상태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다시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유일한 존재이고,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나 역시 사람들과 똑같았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고, 인생에 있어 궁극적인 목표가 뭔지 몰랐다. 학생 때, 나름대로 사회의 기준에 맞춰 열심히 살아왔다. 소설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경험은 나도 다 할 수 있었다. 대학생 때 남들처럼 신나게도 놀아보고, 밤새서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연구실에서 연구활동도 해보고, 위인들이 정립해놓은 그 어려운 공학적 이론들도 뇌가 터지도록 머리를 굴려가며 이해할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고, "까짓것 나라고 왜 못하겠어?!"라는 적당한 과신과 자신감도 있었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라는 유일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고,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책 가장 처음에 나오는 문장이다. 가장 나를 소름 돋게 한 간결한 문장이었고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임팩트가 컸던 문장이었다. 18일 동안 삶에 대해 돌아보는 이 길 위에서 500km 가까이 걸었지만, 아직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남은 기간, 어쩌면 평생 동안 안고 가야 할 숙제일지 모르겠다.

298km 남았다는 표지 앞에서 사진 찍는 나.


걷다가 298km가 남았다는 표지를 보았다. 7로 시작했던 숫자가 어느덧 2까지 줄어들었다. 그냥 하루하루 30km 정도씩 걸었을 뿐인데, 백의 자리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신기했다.


 친구들이 있는 숙소에는 3시가 좀 넘어 도착했다. 거기에는 내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외에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새로운 아저씨, 부부들, 내 나이 또래 여자애, 일본인 등등. 오늘은 한국인, 일본인, 폴란드인 등 여러 외국인들과 즐겁게 술판을 벌이고 잠들었다.


 오늘, '데미안'이라는 인생 책을 만나면서, 여러모로 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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