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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Nov 22. 2024

부모로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적어도 아이답게 살 권리는 지켜주고 싶다

○… 글쓰기 수업 중에 줄 간식거리를 사러 학원이 몰려 있는 골목에 갔다. 학원 앞 가로수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의자를 만들어 두었는데, 두 아이가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다. 두 아이는 작년에 방과 후에서 글쓰기를 함께 했던 4학년 재*이와 시*이. 어린이집이나 방과 후에서 같이 지냈던 아이들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반가워 뭐라도 사줄까 싶은 마음에 아는 척을 하려는데, 학원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 가는지 일어나 움직인다. 시*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꾸벅하고 학원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재*이는 폰에서 눈을 떼지 않아 내가 가까이 갔는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부르지 않고 학원 안으로 들어가는 재*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4학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작은 키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 꾸물꾸물 걸어가는 뒷모습이 애처롭다.


○… 부모가 아이 손에 휴대폰을 쥐어줄 때는 제한 시간을 두는 걸로 관리할 수 있으리라 믿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꽤 영악하다. 아이가 휴대폰을 얻으며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의외로 많다. "넌 좋겠다. 우리 엄마는 못 쓰게 해."라며 부모의 결정에 불만을 품는 것은 귀여운 수준. 부모 눈을 피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자전거를 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휴대폰을 켜놓고 혼자 컵라면을 먹고 있는 4학년, 학원을 빼먹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휴대폰 게임을 하는 4학년. 휴대폰을 얻은 대신, '아이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잃어버린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부모는 모두 이렇게 생각했겠지, 내 아이는 안 그럴 거라고. 다른 아이들도 다 갖고 있으니 없으면 주눅들 거라고. 유치원 다닐 때부터 가진 아이들에 비하면 그간 오래 버틴 거라고.


○… 글쓰기 수업을 하러 방과 후에 갔다. 교사들 분위기가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과 후 교사는 조합원이 일정 정도 모집되지 않으면 내년도 일자리를 보장받기 어려운 직장. 일 년짜리 계약직처럼 이맘때면 고용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 엄마가 선생님 월급 주잖아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대드는 당돌한 아이들 틈새에서 '일 년짜리 교사'로 살다 보면 몸속에 사리가 쌓인다. '그래, 나도 그냥 이게 밥줄이라 마지못해 한다.'라고 대충대충 사는 교사들보다, 일 년을 살더라도, 월급이 적더라도 최선을 다하리라는 교사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는 경우, 이 사리는 더욱 단단하다.


○… 해마다 이 즈음 만나게 되는 '4학년의 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찾는 통곡의 벽보다 높고, 문재인 김정은이 함께 넘었던 군사한계선보다 넘기 어려운가 보다. 10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4학년 아이들이 재원했던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올해도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조사를 하니 두 명의 아이가 재원하겠다고 했단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교사회가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재원을 고민하겠다는 의견도 있었다는데, 프로그램을 짜놓고 받는 것은 생활중심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재정 악화 등 변수가 생겨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할 경우, 그럼 퇴소한다는 걸까? 어쨌든, 두 명이나마 남겠다는 4학년이 있다는 말에 내 머릿속에는 행복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교사회를 믿고 남았다는 말이지? 그럼 기똥차게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을 만들어 주겠어!' 3학년도 아니고, 5학년도 아니고 4학년에만 어울릴 법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팝콘처럼 톡톡 튀어 오른다. 나는 방과 후 정규직 교사도 아니고, 내년에 글쓰기 수업을 하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동육아 방과 후가 적어도 오늘 만난 재*이나 시*이처럼 학원 앞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폰에 코 박고 사는 삶을 일 년이나마 더 유예시켜 줄 수 있음을 확신하는 한, 퇴직교사이자 동네 할매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어쩌면 이것이 복지관 가서 설거지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자원봉사 활동일 수도 있고.


○… 내년부터 5학년 글쓰기 수업을 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인원이 많다. 작년에는 작지만 내 작업실이 있어서 아이들 인원이 어느 정도 되어도 감당할 수 있었는데, 가정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미리 조건을 걸었다. 아이가 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지, 일 년 동안 지속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지, 장소를 흔쾌히 제공할 수 있는지.

내가 글쓰기를 통해 밥벌이를 하려는 게 아니듯(약간의 도움은 되지만), 아이들에게 글쓰기 수업을 하려는 데는 성적을 올려준다거나 논술을 잘 쓰게 하려는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부대적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또래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글쓰기마저 경쟁적 구도로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 여러 해 동안 몸으로 부대끼고 놀면서 관계를 다져 온 아이들은 서로를 당연히 '경쟁 상대'나 '비교 대상'이 아닌, '친구'로만 받아들인다. 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 세 가지를 제시한 것인데, 부모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일타강사도 아닌 주제에 뭐 그리 콧대 높은 조건을 걸었데?'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겠으나, 설사 그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 6학년 아이들 수업에서 AI 디지털 교과서에 대해 토론했다. 이 아이들 역시,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질병에 걸린 지 오래되었지만, 교과서 도입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강하다. 자신들이 뭘 어떻게 제어할 수 없을지도 알고, 건강에 어떻게 좋지 않은지도 알고 있다. 아이들도 반대하고, 선생님들도 반대하고, 학부모도 반대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데, 수천 억을 들여서 추진하려는 이 무모한 계획. '이걸 지금 시행함으로써 누구 주머니를 채우려는 걸까?' 이런 의심이 드는 건 이 정부가 하는 일을 너무 부정적 시선으로만 보기 때문일까?

나는 내년에 사용될 디지털 교과서의 사용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개인용으로 패드를 주면 뭔가 유튜브같이 다른 앱들을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디지털 화면을 보면 시력도 안 좋아지고 만약 화면이 깨지면 수리비도 필요하다. 내가 3학년 때 코로나 때문에 줌으로 수업을 받았었는데 집에 있다 보니 계속 딴짓을 하고 싶어서 힘들었다. 반면 실제로 수업을 들을 때에는 쌤이 바로 앞에 있어서 집중이 더 잘 됐다.(주*)
내년부터 학교에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고 한다. 디지털 교과서에 AI를 접목시킨다고 한다. AI를 이용해 평균보다 점수가 낮은 과목과 문제를 풀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알고 고칠 수 있고,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이렇게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다. 또 교과서가 종이가 아닌 전자기기에서 사용되는 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종이에 쓰는 것과 다르게 전자기기에 필기를 하려면 전자기기용 펜으로 쓸 텐데 그러면 필기를 할 때 불편할 수 있고 처음부터 펜을 주지 않아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 또 전자기기에서 교과서가 아닌 다른 앱에 들어가 다른 용도로 사용해 오히려 수업에 더 집중을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코로나 때처럼 줌으로 수업을 하면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줌이라서 얼굴만 화면에 올려놓고 태블릿 뒤에 컴퓨터로 게임하거나 핸드폰을 책상 아래에 올려놓고 이어폰 끼고 유튜브를 보면 알 수도 없게 되어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게 된다.(재*)
내년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는 해부터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고 한다. 나는 이 제도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AI를 쓰게 되면 당연히 학생의 건강도 안 좋아진다. 예를 들면 거북목이나 손목터널증후군, 시력 저하와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정한 게 무엇보다 기분이 별로고 불쾌했다. 코로나 시대엔 줌 수업도 했었는데 컴퓨터나 전자기기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것 때문에 성적에 문제가 생겨 꿈을 포기할 수도 있다. 물론 컴퓨터 사용 방법을 알면 좋지만 그건 학습의 자유이기 때문에 교육부나 나라가 신경 쓸 건 아닌 것 같다. 만약 패드나 노트북을 준다면 종이책이면 한 권씩 직접 가져가서 공부할 수 있었는데 보안이나 분실 문제로 못 가져가게 하면 너무 불편할 것 같다. 코로나 시대에 줌 수업할 때는 뭔가 더 소통이 안 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고 만나서 수업을 할 때는 눈을 마주치면서 말해 소통이 편하다.(서*)
나는 디지털 교과서가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긴 하다. 아날로그 교과서에서 새로운 교과서를 사용해 보니까 새로울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디지털 교과서가 지나치게 일상적으로 이용되면 안 좋은 점이 더 많을 것 같다. 먼저 자신의 진로,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교육을 강요받아야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계속 디지털 기계를 보게 되면 눈 건강에도 안 좋고 오용으로 인해 중독이 될 수도 있다. 또 대면 수업과 비대면 수업 중 나는 대면수업이 더 효과적인 것 같다. 선생님과 학생이 눈을 보고 있기 때문에 딴짓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수업 자료와 아날로그 수업 자료 중에는 디지털 수업 자료가 더 집중이 잘 되는 것 같다. 선생님의 말만으로는 어디가 수업 진도인지도 모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 보충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신이 원한다면 하는 게 맞지만 디지털 개인 보충은 포기할 자유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시*)
AI가 부족한 과목들을 하라고 시킨다고 하니, 자신이 직접 하는 숙제 같은 것들을 잘하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예산을 사람들의 복지와 국방비(트럼프가 주한미군 임금을 올린다고 해 국방비 예산이 올랐을 것)등 쓸 데가 많을 것인데, 사람들이 반대하는 디지털 교과서 정책에 투자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좋은 점도 많을 것이다. 자신이 못하는 과목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기에 평균적인 성적이 날 수 있지만, 학생들이 잘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하지는 않기에 학생들의 개성이 사라질 수 있다.(연*)

○… 만사에 너무 조급하다. 만사에 너무 경쟁적이다. 아이는 자기 보폭만큼씩 걷고 자기 속도대로 자랄 터인데. 아이답게 놀 권리, 아이답게 살 권리. 그 권리를 지켜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교사도, 부모도 더 자주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살아 보니 일 년은 참 빨리 가고, 십 년 이십 년도 훌쩍 지났다. 내 아이들도 내가 예상한 대로 자라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다고 했던 수많은 고민과 결정이 아이 자신보다는 부모인 내 불안감을 없애기 위한 것도 많았다. 내 아이가 경쟁에서 뒤처질까 걱정하는 시간 대신,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많이 닮게 될 아이를 위해 내 삶을 더 잘 가꿀 걸 그랬다.

부모로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아이답게 살 권리'는 최대한 지켜주고 싶지만, 부모 노릇도 한 번밖에는 할 수 없구나.  삶도 그렇듯.



*대문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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