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솜사탕 씻기

by Kyla

2년의 백수 생활 끝에 맞이한 회사원 생활.

직장인 페르소나로 하루하루를 휘뚜루마뚜루 보낸지 8개월이 되어가고 있다.

이 시기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물로 씻은 솜사탕’과 같다.


이게 뭔 소리인가 싶으면 ‘라쿤 솜사탕’ 짤을 찾아보면 된다. 깔끔한 솜사탕을 먹고 싶었던 순진한 라쿤은 솜사탕을 물에 담근다. 솜사탕은 당연히 눈앞에서 녹아버려 사라진다. 라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사육사가 새로운 솜사탕을 몇 차례 주지만 라쿤은 새로 받은 기회를 계속 물로 씻어내고, 나라 잃은 표정을 반복한다. 삽질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라쿤은 ‘이 간식은 물에 담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드디어 성공적으로 솜사탕을 입에 넣는다. 라쿤은 신세계를 맛본 듯한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웬 라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지난 수습기간, 그리고 수습을 지나 신입 딱지를 떼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염병과 삽질을 일삼았고, 그때마다 시간은 물에 녹은 솜사탕마냥 내 손아귀에서 사라져버렸다. ‘내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대로 헬스장-회사-집 루틴으로 사는 지금 인생에서 나는 성장하고는 있을까?’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달력은 다음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내 손은 비어 있었고, 7개월이 녹아 없어져 있었다. 두 번째 책 원고는커녕 글모임도 운영할 정신이 없어서 5개월 동안 휴식기를 가진 채로. 이걸 깨달은 7월 말에 나는 저 라쿤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분명히 나는 글쓰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취직을 한 것이었다. 첫 책을 내고 들어온 내 첫 인세는 70만 원이었다. 40만 원에 육박하는 글방을 신청하고 엥겔지수를 좀 채우다 보면 사라질 돈이었다. 글만으로 먹고 살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내가 원하는 소설 수업이라도 제대로 듣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2년 동안 부모님의 등골을 빨아먹으며 회피하고 있던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단, 직장인 페르소나는 나의 부캐라는 조건이 붙었다. 어디까지나 내 작가 (스스로 작가라 부르는 것도 남사스럽지만) 페르소나를 본캐로 정체화하면 직장 생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선택은 내 세상을 송두리째 바꿨다.


우선 루틴이란 게 생겨서 주 6일 운동하는 운동 또라이가 되었다. 우리 회사는 자율출근제다 보니 8-11시 사이에 출근하기만 하면 시간 채워서 퇴근하면 된다. 이전 회사에서 만날 지각을 일삼던 ADHD인에게는 최적의 시스템이었다. 평일에 매일 가는 루트가 생기면서, 나는 자연스레 이 새로운 루틴에 맞춰 새벽 운동을 집어넣었다. 월수금은 오전 7시에 회사 근처 헬스장에서 필라테스 그룹수업, 화목은 같은 헬스장에서 오전 6시 PT. 주말에는 동네 근처에서 크로스핏을 했다. 백수였을 때는 루틴을 만들려면 내 의지의 근육이 단단해야 유지가 되었지만, 이제는 주5일을 가고, 그 댓가로 돈을 주는 존재가 생겼으니 루틴 만들기는 훨씬 쉬워졌다. TMI지만 최근에 PT 30회가 끝나서 9월부터는 월수금 필라, 화목은 오전 6시반 회사 근처 지점에서 크로스핏을 시작할 예정이다.


또 뭐가 있을까, 정신병이 많이 가벼워졌다. 루틴이 생기고 내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그런 내가 맘에 퍽 든 모양이다. ADHD는 여전히 콘서타의 최대 복용 용량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우울증은 정말 내가 체감할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그 증거 중 하나는 ‘쓸데 없는’ 경쟁심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쓸데 없는’이 포인트다. 우울증 걸리기 이전의 나는 TOEFL 시험장에서 가장 빨리 나가고, 가장 점수가 높은 수험생이 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문제를 풀었다. (토플은 일괄적으로 시험을 종료하지 않고, 먼저 끝나면 먼저 퇴실하는 구조다.) 언젠가는 나와 비슷한 속도로 마지막 writing session을 마치던 남학생보다 빨리 나가기 위해서 초인적인 힘으로 에세이를 다 쓰고, 후다닥 가방 챙겨 나와서 기어이 1등을 가로챘다. 그 시험 점수가 116점 (120점 만점) 나와서 ‘문제를 빨리 풀고 빨리 나와도 점수는 쩌는 나’에 한참 취하고 자랑하고 다녔다.


최근에 운동을 갑자기 시작한 이유도 생각해보면 ‘지기 싫어서’였다. 누구한테 지기 싫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상이 없다. 그냥 동료들 다수가 운동을 하니까 ‘질 수 없지’ 마음으로 운동을 신청했고, 그 와중에 일찍 퇴근하고 싶어서 새벽반으로 땡겼다. 덕분에 매일 4시 50분쯤 일어나서 첫 차를 타고 운동 가야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엄지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칭찬해주면 거기서 나는 승리감을 느낀다.


우울증에 절여진 인간은 저런 경쟁심 따위에 쏟을 신경이 없다. 당장 오늘 내일 죽어도 괜찮겠다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소용일까. 지난 2018년부터 최근까지 쭉 그래왔다. 다음 날 눈을 무사히 뜨고 살아 있으면, 머리를 일주일 동안 못 감아서 기름냄새가 나고, 얼굴이 기분 나쁜 번들번들함으로 숙성되어가도 그게 일단 이기는 거였다. 최근에 다시 달아오른 경쟁심은 내게 도파민이 되었다. ‘이딴 거’에 신경 쓸 체력이 생겼다는 증거였으니까. 병원에서는 내 표정과 생활, 말투를 보고 약을 조금씩 줄여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도 나는 ‘이겼다.’ 뿌듯해하며 귀가했다. 여전히 뭘 이긴 건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기면 일단 좋다.


제일 중요한 변화는 내가 엄카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이다. 정말 부끄럽지만 나는 2016년부터 올해 2월까지, 엄마의 신용카드를 긁으며 생활을 유지했다. 교통비를 대준다는 게 그 카드의 첫 용도였다. 처음에는 정말 정직하게 엄카를 교통카드로만 썼다. 그렇지만 우울이 날 집어삼키고 내 몇 없던 생활력과 판단력마저 흐릿해져 가면서 엄카에 대한 의존이 점점 심해졌다.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 살 때마저 나는 엄카를 들이밀었다. 친구들에게 밥을 쏜다는 명목으로 엄카를 꺼내드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엄마 카드와 함께한 시절 나는 제일 너그러웠고, 돈을 내준 엄마 대신해서 친구들의 감사 인사를 중간에서 인터셉트했다. 그 자그마한 인사들이 내 바스라진 정신 상태와 자존감에 그나마 작은 반창고가 되었다.


이번 2월,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엄마에게 카톡을 남겼다.

“이번 달 말일에 월급 받아요. 그때 엄마 카드 반납할게요.”

그간 ‘카드 적당히 좀 써라’하던 엄마에게 허황된 약속을 하고 또 긁기를 반복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약속을 지켰다. 물론 아직 소비 습관을 고치는 중이라 내 자금 상태는 박살났지만 엄카가 날 보호해온 10년에 대한 댓가라 생각하며 수습 중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 살아가는 메인 퀘스트는 너무 힘들고, 나이를 먹고 레벨업할수록 내 능력치는 퇴보하는 기분이다. 50-70세 정도에 이 더러운 세상에서 하직하는 무병단수가 나의 여전한 삶의 철학이다. 여전히 이따금씩 죽고 싶고, 내가 먹은 페퍼로니 피자에 독이 들어서 다음 날 못 일어났으면 좋겠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변했다. 2018년 이후로 처음으로 나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나는 행복하진 않지만, 우울하지도 않다. 솜사탕을 물에 씻어서 우울의 흔적들을 지우는 게 아니라, 얼룩이 있는 솜사탕을 그대로 입에 넣는 지혜까진 생겼다.


이제 작가 본캐만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