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윤리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윤리는 인간이 가진 사회성이라는 본능이 집단에 공유되어 관습화 된 것이 윤리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절대적 기준의 윤리는 없다고 생각된다. 사회성의 발현 방식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게 발현된 사회성들 중 공유된 것이 공유의 정도나 강제력의 정도에 따라 선, 윤리, 도덕, 문화, 관습, 규칙, 법과 같은 형태로 구체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윤리는 공유되는 집단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집단은 공간적으로도 다를 것이며 시간적으로도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용인되는 윤리는 다른 나라에서 용인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과거에 통용되던 윤리가 지금에 와서는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윤리는 이렇게 변화하고 상대적이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 말했듯 그 근간은 인간의 사회성이라 생각된다. 사회성에 부합하는 것이 기준점이며,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범위만이 변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과거엔 개인보다는 집단의 범위에 초점을 둔 윤리관이 주를 이루었기에 개인보다는 국가와 가족 같은 소속된 집단 중심의 윤리관이 주를 이룬듯하다. 그러한 소속집단 중심의 윤리관이기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집단(외집단)에 대해서는 윤리관이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성 본능 또한 결국 생존을 위한 본능이기에 내가 속한 집단(내집단)의 생존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는 시대에서는 내집단에게만 사회성이란 본능이 발현되었을 것이고 외집단에게는 발현되지 않았기에 외집단에 대해선 덜 윤리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론 종교적 이중잣대가 있을 것이다. 중세에 행해진 마녀사냥과 십자군 전쟁은 성경에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왼뺨을 맞고든 오른뺨도 내주어라'는 교리들과는 상반되지만 상대가 이단이라는 외집단이기에 다른 기준을 적용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내집단의 범위를 넓힐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면에서 범위가 같이 넓어진 것은 아니나, 최소한 모두 인간이라는 내집단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본주의의 혁명일 것이다. 외집단을 이단, 노예, 오랑캐라고 보기 전에 인간이라는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저 집단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의 공유 집단이 형성되었을 뿐 종교, 자본, 지역 등 다양한 부분에서 여전히 우선되는 내집단이 달라진다. 심지어 내집단이 좁아서 생기는 갈등만이 아닌 더 넓어서 생기는 갈등들도 있다. 인간을 넘어 동물이나 생명, 지구와 생태계까지 내집단을 넓힌 사람들은 넓혀진 내집단을 기존 내집단보다 중요시하기도 한다. 이제는 단순히 내집단 외집단으로만 나눌 수 없다. 한 개인이 지닌 소속이 다양해짐과 동시에 다수의 내집단에 중복으로 소속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안에서 우선시 되는 집단의 윤리가 우선되기에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이러한 지점에서 윤리학이 더욱 중요시된다고 생각한다. 윤리학이란 법이나 규칙같이 명문화된 사회적 본능이 아닌 관습적, 문화적으로 지켜지는 사회성인 윤리를 탐구하여 언어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등을 해결하려면 '그냥'이라는 말로 검증 없이 받아들이던 것을 파헤쳐서 구체화시키고 검증하여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윤리의 발현 형태(행동, 관습, 예절 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윤리의 목적에 집중하여 발현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부분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가져오는 갈등은 어찌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이것은 당장 답을 찾기란 힘들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누고 협의하는 것을 넘어 기술의 발전도 뒷받침해주어야 협의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보통 윤리의 본질은 집단의 지속 가능한 생존이라고 생각한다. 생존권의 대립을 해결하는 방법은 기술적 진보 외에는 큰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충분한 사전 대화가 없다면 기술이 발전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윤리는 절대적인 것이기보다는 변화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