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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이 Jun 18. 2023

나는 이제 글을 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불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하지 않았다. 불행에는 억울함, 분노, 자책, 합리화처럼 복합적인 감정들이 뒤엉켜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타르처럼 가슴에 들러붙을 기세라 무언가로 긁어내는 번잡스러운 행위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긁어낼 때마다 살점이 조금이라도 뜯겨나가는 고통 정도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건 상처로 남았다. 궁금했다. 분명히 상처받았고 아픈데 나는 가만히 수용하는 자세로 한탄만 하는지. 까맣게 잊혀버려 수분 공급을 받지 못한 화초처럼 당장에 물 한줄기를 공급받지 못하면 부러질 판이었다. 그때 한 줄의 텍스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건 드라마틱한 타이밍이었다. 이혼을 감행한 작가의 자전소설이었는데, 강렬한 제목이 궁금증을 유발했다. 일말의 의욕도 없었지만 산소 공급을 하듯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결혼생활, 남편과 시댁에서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요구되는 부당한 역할극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작가는 나를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마치 내 마음속을 헤엄치다 바닥을 훑어내어 검은 덩어리를 들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 알았다. 그건 ‘공감’이라는 감정의 환희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공감은 마음의 빗장을 열고 연결고리를 걸 자리를 내어주게 했다. 요철같이 불규칙한 내 감정은 작가가 펼쳐놓은 이야기 속에 같은 결을 찾아 드러누웠다. 나를 이끄는 텍스트의 향연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거다. 그리고 그 향연의 피날레에 나는 ‘감동’을 선사받았다. 마치 나만이 경품에 당첨된 것처럼 기쁜 일이었다.






존재하는 수많은 글자들, 그것들을  끌어 모아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퍼즐조각을 맞추는 사람 같았다.



 



작가의 진솔한 작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영혼’이라는 연료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와 같은 처지도 정황도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인생 여정을 사는 동안의 감정의 색채가 원색이었고 나는 단지 같은 색을 찾기 쉬워 감동받은 거였다. 하지만 감동의 가성 비는 대단했다. 단지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이후로는 글을 보는 관점이 바뀌기 시작했다. 단어가 합쳐진, 채 열자가 되지 않는 텍스트의 힘은 꽤나 위력이 세다는 걸. 그리고 글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그려졌다. 존재하는 수많은 글자들, 그것들을  끌어 모아 자신이 생각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퍼즐조각을 맞추는 사람 같았다. 내가 보던 것은 다 맞춰진 그림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 안에 너무도 많은 마음들이 산발적으로 흩어져있고 또는 너무 꽁꽁 뭉쳐져 있어 어느 것도 형체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흩어져있는 것은 모으고 뭉쳐져 있는 것은 떼어내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것을 펼쳐놓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그 행위가 바로 글쓰기였다. 


무작정 집어 든 한 조각이 어떤 모양의 한 부분인지 모를 일이었다. 단지 비슷해 보이는 기억과 감정의 조각을 요리조리 붙여보다가 한 귀퉁이가 만들어졌다. 산발적으로 뭉텅이가 모양을 보이기 시작했고 곧 형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무어라도 쓰기 시작했던 거다. 일기를 썼다가 메모를 했다가, 가계부를 쓰다가 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위 즉 뭐라도 쓰는 행위가 나를 변하게 했다. 어느덧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펜을 들 때마다 비말 같은 수분이 뿜어졌다. 잦은 분무 질은 감정을 촉촉하게 유지시켰다. 그렇게 글 쓰는 습관을 지속하면서 불행의 퍼즐 조각을 맞추고 모양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존감 낮은 나였음을 발견했다. 놀라서 멍했다. 하지만 고마웠다. 누군가가 쓴 글이 스스로를 바라보고 불행의 실체를 알게 해 줬기에 실로 위대한 일이었다. 글을 씀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카타르시스’를 얻었다. ‘카타르시스’는 역경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감정의 청결함이었다. 이제 그 역경의 자리에 글을 존경하는 마음이 대신한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작가 지망생도 아니다. 단지 넘쳐흐른 생각과 감정들을 주워서 나열하고 있는 중이다. 기왕이면 그 전시효과가 좀 더 그럴싸하고 감동을 주는 것이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글을 쓰는 할머니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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