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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하늘 May 19. 2021

나의 우울증..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언제 부터였을까 삶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고등학교 시절 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늦가을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빠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들었던 날이


어떻게 병원을 갔고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강하게 기억 나는 것은 아빠의 마지막 모습 그날의 풍경 그리고 병원 장례식장에서의 나의모습 정도이다.


그날도 하교 후 병원 중환자실로 올라가 아빠를 보았다. 갑자기 삐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얼마 후 간호사들은 심전도 모니터를 껐다. 그렇게 어느날 저녁 아빠는 돌아가셨다. 내 기억속에는 영화도 드라마에서 보든 흔한 심폐소생술도 없었고 삐 소리와 함께 아빠는 편안히 떠났다. 그날은 가까운 친척분들도 함께 중환자실에 있었다. 아마 아빠가 임종에 임박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나 보다.


아빠는 뺑소니 교통사고 후 몇주를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 17세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어리다면 어린나이에 죽음에 대해 알았고 인생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사실도 빨리 깨달았으며 한 사람이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지는데 별로 길지 않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때 부터 아마 나의 우울증은 조금씩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나는 빨리 평상시 생활로 돌아왔다. 곧 대학입시를 준비해야되서 바빴고 어머니는 오빠와 나를 위해 생업에 뛰어들어야 해서 더 바빴고 오빠는 대학을 가서 집을 떠났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우리가족은 각자 따로 살기 시작했고 아파도 슬퍼도 이야기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일을 모두에게 상처였고 누구도 이야기 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오빠도 나의 힘듬과 아픔 따위를 들어줄 여유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는 10년 동안 내 안에 우울과 생을 바로 보는 염세적인 태도는 항상 존재했다. 항상 열심히 살고 있는 나를 보며 이렇게 살면 뭐하나 생각하는 동시에 그래도 또 노력하며 열심히 살았다. 인정받고 싶었고 잘 살고 싶었고 자랑스러운 딸이되고 싶었다.


이민을 가기로 결심하고는 더 열심히 살았다. 영어공부도 하고 프랑스어 공부도 했다. 이 곳에서 컴퓨터 관련 학과 졸업해서 취업도 했다. 캐나다에 와서 7년을 넘게 하루도 열심히 안 살아본 날이 없다.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도 늘 사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죽을병이 걸리면 안락사 하러 스위스에 갈 것이라고 이야기도 했다.


우울증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의 감정상태라고 한다. 내가 심각한 우울증이 왔다고 자각한것은 오늘이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모든일이 너무나 싫은것이다. 앞으로 다가온 날들이 갑갑하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죽고만 싶었다. 모든것이 끝나면 매일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쳤던 나도 말도 잘 안통하는 곳에서 버둥거리며 잘 사는 척 코스프레 하는 것도 그만 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사는게 너무 지친다. 미친듯이 열심히 달려왔는데 나는 장애아를 낳았다. 아이가 아파서 안쓰러운거 보다 내가 그 아이를 죽을때가 돌봐야 한다는 것이 더 가슴 아프다. 지금보다 두배는 더 열심히 살라고 하는것 같았다. 나는 지금 까지도 죽을 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더 열심히 살라는 거는 나한테 죽으라는거 같았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죽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왜 죽을만큼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다 놓고 싶다 그냥 편해지고 싶다. 아무것도 안하고 쉬고싶다.



 


이 글을 2021년 3월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때 발행 하지 못한것을 5월 와서야 발행하게 되었음을 알리며 지금은 괜찮은건지 괜찮아 지려고 하는것인지 그런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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