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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깨달음

앞에서 얘기했던 기획서가 잘 되어서(도대체 어떤 부분이 잘 어필된 건지 모르겠지만) 본격적으로 인수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회사가 이 정도 크기의 회사를 인수해본 경험도 없고 인수하려는 회사의 사업에 대한 경험도 없어서 회사 안에 물어볼 사람도 하나 없어 심지어 팀장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실무자인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해야 했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자문사부터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연락해서 만든 리스트를 가지고 사장님 보고를 했습니다.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서는 업계 최고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비싼 자문사가 최고라고 생각하셨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일 비싼 자문료를 제안한 유명 자문사를 고민 없이 선택하시더니 자문료도 안 깎으시더군요.


인수 업무를 시작했더니 인수할 회사가 정말 다양한 사업들을 갖고 있어서 검토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기에 각각의 영역을 보기 위해 기술, 법무, 재무, 세무, 환경 등 각각 분야에 최고 자문사를 고용하고도 부족하다고 느끼셨는지 같은 분야에 국내 자문과 해외 자문을 겹쳐서 고용할 정도로 자문사로 도배하시더군요.

만약에 인수가 성공적으로 성사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100억 원 정도 되는 돈이 자문료로 나갈 정도였으니 이때 ‘돈 많다고 하더니 그건 사실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내부에서도 빵빵하게 인력지원을 받았는데 어림잡아 인수를 위한 TF 멤버만 20명이 될 정도였고 내부 인력에 자문사 인력까지 같이 일할 공간이 없어서 회사가 소유한 건물 중 한 층을 비워서 인수를 위한 사무공간으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돈 많은 회사였던 건 맞는 것 같네요.


다음으로 인수를 위한 체계를 만들어야 했는데 재미있는 건 팀장이 제안한 사업이라 인수 TF의 실무책임자는 팀장이 되고 TF 전체 총괄은 팀장 위에 전무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업이나 인수 경험 없이 현장에서 근무하던 다른 조직의 상무가 TF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때 팀장이 위에 손을 써서 전무가 이 일을 맡지 못하게 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전무를 이 일에서 배제할 명분도 없었음에도 그냥 본인이 싫어서 뺀 것이라 옆에서 보기에 좀 그랬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자문사도 갖춰지고 인력도 지원받아 인수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인수할 회사를 분석하고 현장 실사도 다녀오고 내부 회의도 하는 등 인수제안서 작성을 위한 업무와 더불어 내부 보고서도 작성했는데 앞서 얘기했던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긁어 올리는 저인망식 자료조사가 지겹도록 이어졌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고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들여하겠지만 정말 필요한 일인지 자문사들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일이 많았고요. (자문사들은 돈 주는 사람들이 시키는 건 정말 이상해도 못 하겠다고 안 해요.)

그런 자료를 찾고 정리한다고 정작 챙겨야 하는 중요한 일들을 놓치는 경우도 생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사람들이 벌컥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인수업무가 늦여름에 시작해서 가을쯤 끝나는 일정이라 추석이 끝나자마자 내부 의사결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추석 전까지 내부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해서 TF 인원 전부 추석 전날까지 나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밤에 퇴근할 무렵 TF장인 상무가 보고서 초안을 보다가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나와 보고서에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그거 없으면 절대 안 된다고 추석날도 나와서 일해야 된다고 거품을 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부분이 빠진 줄 알고 긴장하면서 듣다가 상무가 얘기하는 추가 조사해야 한다는 그 부분이 별로 의미도 없고 영향도 미미하지만 상무가 잘 아는 내용이기 때문에 거품 물고 얘기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다들 황당해하고 있었지요.


보다 못한 그 분야 전문가이신 부장님이 조심스럽게 그렇게 까지는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하자 상무는 자기 말에 사람들이 안 따른다고 생각했는지 있는 성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왜 이런 모습을 전에 경험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요?)

전문가이신 부장님도 상무에게 설명하다 하다 지쳐버려 결국 상무가 얘기한 부분은 집에서 보고서 완성해서 취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추석 전날 집에 가는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까지 살벌한 건 처음 봤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진을 있는 대로 빼고 진행했던 그 사업건은 결국 실패했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 돌아간 팀에서는 바쁜데 자리 비웠다는 원망만 들으면서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복귀했습니다.

저는 인수업무 마무리로 자문사 비용을 정산을 하고 있었는데 재무 쪽 부서에서 사업도 실패했는데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썼냐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매일 돈 달라고 전화해대는 자문사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TF장이었던 상무만은 사업 실패와 상관없이 그 일을 계기로 더 좋은 자리로 진급해버렸습니다.


아마 이 때부터 회사 안에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잘 나가는 사람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차라리 회사에서 잘 못 나가더라도 일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하는 것도 없이 윗사람에게만 잘 보여서 회사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회사생활#인수#자문사#인수검토#상무#삽질#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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