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4주째 계속되고 있다.
국제뉴스 취재를 위해 나는 그동안 우크라이나 시민과 현지 방송국 언론인, 그리고 국경에서 피난민들을 돕는 국제구호단체 직원을 섭외했고, 화상 인터뷰를 통해 그들에게 직접 현지 상황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침공이 있었던 직후, 제일 먼저 인터뷰를 했던 우크라이나 시민은 당차고 멋진 30대 커리어우먼이었다. 우크라이나를 왜 떠나지 않는지 묻자 ‘여기가 우리 집인데 어딜 가나요..’라고 답한 그녀는 어린 조카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필요하다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성별도 같고, 나이도 비슷한 우리는 인터뷰가 끝난 후 금세 친구가 되었고, 이후로도 그녀를 통해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고 있다. 외신 매체로만 접하던 먼 나라 땅의 이야기가 이제는 가까운 '친구의 소식'이 되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부쩍 크게 피부로 와닿는다.
폴란드 국경에서 난민을 돕는 국제구호단체 직원은 조금 더 감성적인 호소를 해왔다.
난민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지난 몇 년간 세계를 돌며 난민을 돕고 있는 그는 국제구호 베테랑이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례없는 규모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난민들을 보며 크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난민들은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인데, 아빠가 보고싶다고 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는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슬픔이 깔려있었다.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묻는 이들에게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며 고개를 떨구는 그를 보며 내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불과 6개월 전에도 일어났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탈레반이 순식간에 카불을 점령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었고, 필사적으로 카불을 빠져나가려던 인파 사이에서 철조망 너머로 미군에게 갓난아이를 넘기던 어머니의 영상이 퍼지며 전세계 많은 이들이 함께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나는 탈레반의 여성 탄압에 맞서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교수님을 취재했는데, 그분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겪고있는 상황과 절박한 심정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점차 장기화되었고, 나 또한 오랜시간 이들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다보니 거의 3주에 가까운 시간동안 정신적 피로감(mental fatigue)을 겪기도 했다.
더욱이 mbti 중에서도 나는 F(감성형) 타입으로 쉽게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고 이입하기 때문에 이렇게 전쟁과 재난 상황을 취재할 때면 마치 내게 일어난 일처럼 크게 슬퍼하고, 또 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음에 무력감마저 느끼기도 한다.
국제뉴스를 취재하다보면 이렇게 참혹한 전쟁의 실상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반갑고 뜻깊은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대부분 세계적으로 들려오는 한국의 예능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소식들이다.
지난 12월에는 미국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에 최초 한국계 캐릭터로 데뷔한 '지영' 캐릭터를 취재하며 아시아인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미국 사회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 주연 배우들의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3관왕 같은 기쁜 소식들을 전하기도 했다.
시상식에 오른 배우들의 영상을 볼 때는 마치 현장에 있는 듯 뜨거운 열기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의 활약을 보며 내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번진다.
최신 컨텐츠 동향을 파악하기에도 여념이 없다. 호황기를 맞이한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매일같이 매력적인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고, 산드라 오 주연의 한국어 제목을 가진 영화 <Umma(엄마)>나 화려한 스케일과 캐스팅으로 관심을 모은 <파친코>처럼 자랑스러운 한국 컨텐츠들이 <오징어 게임>의 명성을 이어나가고 있다.
컨텐츠 분석과 인터뷰 준비를 위해 직접 드라마를 챙겨보면서 탄탄한 스토리와 감동적인 메세지에 희노애락을 느끼기도 하고, 배우들이 출연한 예능과 오락 프로그램들을 보며 오랜만에 소리내어 웃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얼굴에 번졌던 미소도 잠시,
시선을 돌리자 암울한 소식들을 다시 마주한다.
뉴스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의 포격과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소식이 전해지고 있고, SNS 속 전 세계 친구들은 오늘도 저마다의 슬픈 사연을 공유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참혹한 현실을 보며 다시 서서히 얼굴에 그늘이 진다.
애써 외면하며 예능을 마저 보려 해보지만 이내 문득
아들을 잃고 오열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포격을 당해 무너진 키이우 도시의 잔해들이 떠오른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세계 반대편에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미안한 마음에 죄책감마저 든다.
내 눈을 바라보며 슬픔을 호소했던 아프가니스탄의 교수님, 우크라이나의 친구, 그리고 구호단체 직원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오른다. 화면 너머로 따뜻한 온정을 나누었던 이들의 안부가 걱정된다.
오늘도 뉴스와 예능 사이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한 마음이 계속된다.
1. 우크라이나 시민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SpXbTD7xeZE
2. 유엔난민기구 직원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FK1JcYX6WK0&t=64s
3. 아프가니스탄 교수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pGxUWUHuryM&t=8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