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이젠하워의 2차 대전시절을 다룬 TV 미니시리즈 ‘아이크(Ike)’를 TV에서 방영하고 있었다.
10살 무렵쯤 KBS채널에선 매주 일요일마다 영국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WORLD WAR Ⅱ를 방영하였다. 아버지는 열렬한 시청자셨고 따라서 식구들도 그 프로를 자연히 즐겨 보게 되었다. 나도 덩달아 열혈 팬이 되었고 전쟁사의 주역들을 다큐로 음미하곤 했다.
때마침 아이크를 더 잘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열심 시청 중, 아주 중요한 대목에서 자리를 비워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내켜하진 않으셨으나 이 전쟁영웅에 대한 영화를 꼭 봐야 한다는 딸의 이기심에 TV채널권을 양보한 어머니께 잘 보고 계시다가 장면들과 스토리를 얘기해 달라고 하고 자리를 떴다.
돌아와서 어머니께 내가 놓친 장면과 스토리를 요청드렸더니 아이크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혼수상태에서 연인(운전병이자 비서인 케이 서머스비)이 다녀갔는데 아이크가 깨어나서 대번에 다녀간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아니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러자 어머닌 “흠 이 냄새는… 아 다녀갔군” 그러면서 연인의 향수냄새로 기억을 했어… 그 험한 전쟁 통 속에서도 그 수컷과 암컷은 유통기한 없는 뜨거운 본능을 달달 히 드러내더구나. 그 젊잖아 보이는 늙은 수컷도, 젊은 여심을 갈구하는 엉큼함이 있다니…. 남자들이란 원.. 쯧쯧… 하시며 긴 한숨을 토해내셨다.
무소불위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크가 젊은 여자의 사랑을 송두리째 갈구하는 엉큼남 사내로 보이셔서 그런 건지 아님, 남녀 간의 눈 맞음은 장소불문, 세월무효, 시간 제약 없음에 한숨을 쉬신 건지 어머니의 긴 한숨은 아직까지도 아리송하지만, 어머니의 한숨이 내겐 아이크란 남자는 2차 대전 최고의 사령관이란 기억보다는 순정 여심킬러, 수컷 사내란 기억만 업그레이드해주었다.
그런 촌철살인적 말솜씨를 뽐내시던 어머니의 매력 남은 사실 따로 있었다.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롯이 살아낸 어머닌 10대 후반 6.25 사변을 겪으셨다. 난리통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군 치하의 서울 사대문 안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 서울 수복 후 9월 29일 정오 서울 중앙청으로 환도식을 하러 맥아더가 당당히 세종로 에 등장했을 때 대로변 만세 삼창을 외치던 10대 소녀의 마음은 자동으로 흐물흐물 무장해제되었다.
바로 소녀의 마음속에 맥아더는 수컷으로 등극한 것이다. 맥아더는 어머니에게 공산군을 물리친 영웅, 불세출의 매력남 수컷이었다.
여담으로 아이크와 맥아더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아이젠하워를 만난 한 여성은...
맥아더를 만났을 때. 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장군인지 알게 됐어요. 하지만 아이크를 만나자 내가 얼마나 매력 있고 사랑스러운 여자인지 알게 됐지요.
여심에 어필하는 매력남 아이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진정한 수컷, 그 반전 매력 남은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