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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율 Feb 18. 2024

복직 1일 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하루였다.



나의 수험기간은 잠과의 전쟁이었다.

잠이 많은 탓에 아침마다 늘 전쟁이었고,

학창 시절에는 지각을 밥 먹듯 할 뻔했다.

그러나 지각은 하지 않은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나 할까.


부족한 잠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책상 위는 늘 수면 중인 학생을 가리기 위한 책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든 건 변함없었다.


혈액순환이 안된 채 일어나다 보니 아침에 기절하는 일도 잦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쓰러진 장소가 주로 우리 집 화장실이었다는 것.

당시 우리 집은 요상하게 화장실이 넓었는데, 덕분에 쓰러져도 팔다리에 멍만 조금 들뿐 안전했다.


매일 아침마다 제일 괴로웠던 건 잠에서 깰 때의 피곤함이다. 너무 피곤하다 못해, 온몸이 솜옷을 입고 깊은 물속에 잠겨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것만 같이 무겁고 축 쳐지는 그 느낌.


그래서 가끔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이 있으면 늘 마음이 무겁다.





 복직 첫날.

아이 둘을 각각 다른 기관에 등원시키고 출근을 하려면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출발해야 한다.

첫날이니 여유 있게 일찍 도착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평상시보다 한 시간 반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새벽까지 깨어는 있어도, 새벽에 일어나는 게 쉽지 않은 나는 긴장부터 된다.



복직 첫날이니 기분 좋게 등원하겠다는 약속까지 한 첫째 건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옷만 갈아입히고 겨우겨우 달래 등원하는 길에

결국, 아이는 눈물을 보였다.

너무 피곤하니 어쩔 줄 모르면서도, 꾸역꾸역 등원길에 올라준다.

첫째의 유치원은 주차장에서 꽤 거리가 있는지라,

남편이 잠든 둘째를 안고 있는 사이 서둘러 첫째를 데려다준고 온다.


매번 잠든 채 어린이집에 넘겨졌던 둘째는,

어린이집 입구에서 깨서 한바탕 울음을 날려준다.


역시 첫날부터 쉽지 않다.

두 아이의 울음보를 맞이하고 달래고,

그치지 않는 울음을 보며 헤어지는 발걸음은

언제나. 무겁다.



이제 겨우 출근.

하루종일 회의이다.

회사의 풍경과 사무실, 그리고 업무들.

모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모든 게 그대로 정지해 있는 듯했지만, 새로운 업무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당황스러울뿐이다. 업무란 게 연속성이 있어서 하다 보면 쉬워지는데, 오랜기간 단절을 겪은 나에게는 어렵기 그지없다.

회사 생활동안 알게 모르게 몸과 머리에 베어든 지식과 요령은 일을 빨리, 그리고 더 쉽게 해 준다. 그런 배경 지식이 0으로 소급해버린 나는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이다.

하루종일 회의를 하는데, 종종 정신이 탈출해 나가 버린 느낌이다. 너무 지친 내 영혼이 나한테는 말도 없이, 혼자서 잠깐 쉬고 오는 느낌이랄까.


짧지만 지치는 회의들을 끝내고,

팀장님의 야근을 뒤로하고 서둘러 나왔다.


둘째는 돌봄 선생님이 데리고 와주셨고,

첫째는 혼자서 유치원 셔틀을 내려서,

태권도 학원에 가서 대기하다가

태권도 수업을 듣고

다시 피아노 학원에 가서 피아노 수업을 듣다가

스스로 집에 왔다.

지난주부터 엄마와 함께 연습도 해보고,

혼자서도 연습해 보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핸드폰까지 개통해 준 상태.

다행히 아이는 스스로 잘 찾아가고 있다며 전화를 주었다.

회사에서 개인적인 전화받는 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아이의 전화는 꼭 받아주기로 마음먹는다.







20여 년간 오래 알고 지냈던 동생이자 회사 선배가 새 팀장님이 되셨다. 나야 그냥 깍듯이 대하면 되지만, 팀장님은 반말을 하셨다가, 존댓말을 하셨다가 허둥지둥이다. 어쩌면, 더 어럽고 곤란한 건 일을 시키는 팀장님일 테다.


너무 좋은 팀장님으로 바뀌었으니

잘하고 싶은데, 일이란 게 잘하고 싶다고 잘해지는 게 아니라는 변함없는 사실이 다시 한번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럼에도, 팀장님이 퇴근을 하지 않았음에도 직원들의 쿨한 퇴근은 새로운 팀장님 덕분이다.


쿨하게 퇴근을 해,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고

뺏기만 하는 첫째를 혼내고,

당하는 둘째를 달래다

애들이 남긴 밥을 먹고

겨우 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평일에(그게 허니문 기간인 초반뿐일지라도)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보낼 수 있다니 그거면 되었지 싶다.


일찍 좀 자주면 좋으련만,

잠이 안 온다는 핑계로 우유도 마시러 나갔가다,

물도 마시러 나갔다가,

그제야 식사하고 밥 먹는 거실에 있는 아빠가 보고 싶다고 나갔다가,

침대에서 싸우다, 뒹굴다, 때리다 울다 난리였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보낸 저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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