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영국 철학자 버틀런드 러셀은 열정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탁월한 철학자, 수학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학, 역사학, 종교학, 교육학, 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져 큰 업적을 남겼다. 다방면의 많은 저서가 이를 말해준다. 기본적으로 천재였기에 가능했겠지만 왕성한 열정이 큰 몫을 했다고 본다.
또한 그는 발군의 문필가였다. 틈만 나면 미국과 유럽 각국 신문과 잡지에 글을 써 이름을 알렸다. 나이 들어서는 소설도 썼다. 노벨 문학상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노년에는 핵무기 반대 평화운동에 투신했으며, 90세를 넘긴 나이에 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잔학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상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뜻이리라.
이런 열정적인 삶은 당연히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자서전에서 그는 살아온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꺼이 다시 살아보고 싶다”라고 썼다. 저서 ‘행복의 정복’에서 “열정이 행복을 만든다”라고 단언한 것은 당연한 말로 들린다. 책에는 열정의 본질과, 종류, 강점, 한계 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열정이 행복을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성취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세상의 위대한 것 중에 열정 없이 이룩된 것은 없다”라고 했다. 소설가 오노레 발자크는 “열정이 인성(人性)의 전부다”라고 했다. 열정이 없으면 종교, 역사, 소설. 예술이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란다.
그렇다. 열정은 인생사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해야겠다. 사회나 조직은 물론 개인을 탁월하게 만드는데 열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학업 성적을 올리는데도, 든든한 직장을 구하는데도, 사업 규모를 키우는데도, 좋은 친구를 사귀는데도, 아름다운 사랑을 쟁취하는데도 열정은 필수다. 열정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없는 사람에 비해 모조건 유리하다. 열정은 마법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정이라는 자양분이 공급되면 능력이 배가되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크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열정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행복하다. 매사에 무기력한 사람과 비교해 보라. 열정적인 사람은 크든 작든 삶의 목표가 있기에 활력이 넘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배움의 자세를 취하기에 하루하루가 기쁘고 즐겁다. 무기력한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반대다.
러셀은 열정이 관심과 흥미에 달렸다고 보았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것에 관심이 생기는 순간 권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활력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열정적인 흥미를 갖게 된단다. 그가 삶에서 ‘관심’을 무엇보다 중시한 이유다.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이 비슷할 경우 어느 것 하나에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 비해 성공하고 행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 러셀의 생각이다.
‘행복의 정복’에서 그는 관심 분야가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관심 분야가 많은 사람일수록 행복해질 기회가 그만큼 늘어나고, 불행의 여신에 의해 휘둘릴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설령 어떤 것을 잃더라도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장선상에서 러셀은 인생의 폭을 협소하게 제한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것이 지나치게 협소할 경우 사소하고 우연한 사건에 자기 인생의 모든 의미와 목표가 한순간에 훼손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서두에 소개한 문장처럼,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고 한 것은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여러 낯선 곳에서 멋진 경험을 쌓는 사람은 당연히 관심사가 다양해지고 그만큼 흥미와 열정이 솟아날 것이다.
하지만 열정이 러셀의 말처럼 모든 사람에게 손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태생적 성격이 소극적이거나 조심성이 많은 사람은 관심 갖는 것 자체를 꺼린다. 흥미가 있을 리 없다. 이런 사람에게 자기 계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숨겨진 자신만의 열정을 찾으라고 조언하지만 쉽지 않다.
이 지점에서 ‘행복중독자’의 저자 올리버 버크먼의 조언에 귀 기울여보자. “열정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열정이란 잠 못 이루며 고민하고 흥분해서 찾아내야 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열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일도 마찬가지란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싫어하는 일에조차 열정이 생긴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진 않는다. 아마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애초에 찾을만한 열정이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열정이 관심과 흥미의 산물이라면 언젠가 관심을 가졌던 일,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행동으로 옮겨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일을 왜 하려는 거지라는 생각, 혹은 그 일을 꼭 해야만 할까라는 의문이 들더라도 일단 해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반드시 그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단지 하고 싶으니까 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최소한 싫어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흥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40대 직장인이 회사 생활에 심각한 수준의 권태가 찾아왔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 말고 특별히 관심 가는 일이 없다고 치자. “나는 왜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없을까?” “나는 왜 괜찮은 취미나 특기가 없을까?” “남은 인생도 이처럼 무미건조하게 보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하는 사람 참 많다.
실망할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특별히 싫어하는 일이 아니라면, 혹은 조금이라도 원하는 일이라면 일단 시작해 보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하다 보면 내면 깊숙이 숨어있던 열정이 밖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없던 열정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주위의 걱정스러운 시선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인 중에 20년 직장 생활에 매너리즘을 느낀 나머지 고민 끝에 사표를 내고 횟집을 차린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 바닷가 고향에 살 때 상상했던 직업이다. 다행히 흥미를 갖게 되고,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돈도 꽤 벌었다. 주변에 조금씩 봉사와 기부를 하면서 지역 사회 발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은 지방의원이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열정은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이 들수록 점차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외로움에 휩싸일 가능성이 큰 노년에 열정까지 잃게 되면 일상이 피폐해질 수 있다. 하지만 열정은 모든 노인에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친척 아주머니 중에 젊은이들 못지않게 왕성한 열정으로 노년을 즐기는 분이 있다. 평생 교직에 몸담으면서 시조시인으로 활동한 아주머니는 80세를 훌쩍 넘겼음에도 지역 사회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컴퓨터 조작 능력과 문서 편집 솜씨는 자녀들 못지않게 뛰어나다. 현재 노인대학에서 한자를 공부하며 조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최근에는 뜨개질 작품들을 한데 모아 동네 성당에서 전시회를 연 데 이어, 신자들을 상대로 기능 봉사를 시작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특별히 좋아했다는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이 생각난다. “청춘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을 뜻하나니…” 울만이 78세 때 쓴 시다. 아주머니에게 열정이 대단하시다고 축하 문자를 보냈더니 이런 답신이 왔다. “저녁놀이 지려고 하네요. 해 떨어지기 전에 조그마한 능력이지만 남을 돕고 싶어 시작했어요.” 해 지려면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
열정은 아예 없거나 너무 적은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많은 것도 문제다. 러셀이 이 부분을 유의미하게 지적한 것을 보면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기 자신이 그런 류의 사람이어서 스스로 경종을 울리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는 열정이 불행의 원천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결코 도를 넘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 있다며 특별히 다음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건강을 유지하는 것, 둘째 자신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유지하는 것, 셋째 생계유지를 위해 충분한 소득을 유지하는 것, 넷째 가족에 대한 의무를 유지하는 것. 러셀은 말한다. “이런 모든 것을 버리고 체스에 매달리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알코올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언뜻 열정적인 사람은 모두 멋져 보이지만 지나치면 불행해질 수 있음을 러셀이 적절히 지적한 셈이다. 오지 탐험에 몰두하다 불의의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 학자로 남았으면 큰 명성을 얻었을 텐데 굳이 사업에 뛰어든 사람, 불건전한 종교에 현혹돼 재산 탕진하고 노숙자가 된 사람, 중년 이후 엉뚱한 사랑에 빠져 가족을 등진 사람이 행복할 리 없다.
러셀은 열정을 논하면서 중용(中庸)의 삶을 거듭 강조했다. 세상사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